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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현선생의 본관은 장수로, 조선 세종조 명상 황희의 16대손이다. 1848년 황처곤의 차자로 태어나 문무를 두루 갖추었다. 1878년 무과에 급제하여 사과, 선전관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나 개항이후 심화되는 외세의 침략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1881년 내수외양을 강조하는 척사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정부 정책에 거슬렸다는 이유로 진도에 유배되어 4년여의 고초를 격은 후 풀려났다. 그후 고향에 은거하던 중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되는 을비사변이 있었고, 이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니 이른바 을미의병이었다. 이 때 이웃 고을인 홍주에서도 김복한 이설 등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다가 함께 하기로 한 홍주목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모두 체포되었다. 이 홍주의병에 가담했던 무과 출신 이세영은 몰래 남포로 빠져 나와 선생을 비롯한 김홍제 이관 등과 함께 1896년 1월 중순 의병을 일으켜 남포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실패하고 선생은 체포되어 남포 감옥에서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미 의병 해산 권고 조칙이 내렸으므로 더 이상의 의병은 정부를 거스르는 죄가 되고 있었다. 지역의 유생과 백성들은 남포군수에게 탄원서를 올려 선생의 선생의 의병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일본에 복수하려는 위국충정에서 발로 된것이므로 석방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해산 조칙 후에도 계속되는 의병을 무마하기 위해 정부는 선유사를 파견하고 있었는데, 선유사 신기전이 홍주를 거쳐 1896년 3월 남포에 와서 3일을 머무르며 선유하고 선생을 석방시켰다. 이후 선생은 시국을 걱정하며 지내다가 1903년 56세로 사망하였다. 일찍이 일본과의 척화소를 올려다가 대신의 위협을 받고서도 굽히지 않고 "개도 주인이 아니면 짖는데, 인신이 되어서 나라의 위태로운 것을 보고도 아무 말이 없을 수 있느냐"고 대들 만큼 강직하고 굴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선유사 신기선이 선생을 만나보고 가히 쓸만한 인재라고 보고한 사실, 유인석, 최익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