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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깨워 인접한 동리로 노도같이 퍼져나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그 다음날 3월 17일 밤 또 다시 야용리 복개봉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모의하였으나 무자비한 체포령으로 동지들이 연행되어 거사가 와해될 위기에 있던 중 박연화가 홀로 새벽에 그곳에 올라 태극기를 꽂고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니 차가운 새벽공기를 가른 민족노한의 절규에 일인들은 모골이 숙연하였으리라. 다행히도 이철원은 미주에 망명하였으나 십여동지들은 모령경찰서에 체포되어 날마다 2회씩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소위 보안법위반이란 죄명으로 40여일만에 60에서 90의 태형을 받으시니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육신으로 걸어 나오지 못하고 교자로 귀가하였으면 창상으로 인하여 사망한 지사도 있고 일생을 불구의 몸으로 요시찰인물이 되어 고초를 겪으니 비명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일경은 국사봉만세운동이후에 매일같이 주렴산하의 모든 동리를 순찰하며 무고한 농민들을 구타하는가 하면 공포를 쏘아 부녀자를 위협하며 궤연을 부수는 등 만행을 수개월간 계속하니 천인이 공노할 일제의 학정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었으나 그에 저항하여 정의의 선봉에 선 애국지사들의 행적이야말로 청사에 길이 빛나리라. 여기 또 두분의 독립운동가가 계시니 파평인 윤길은 증산리 출신으로 한일합방의 울분을 참지못하여 두만강을 건너 북만주와 러시아 영토 불라디보스톡으로 다니며 독립지사들과 같이 왜병과 싸우고 상해임시정부 이시영과 만나며 국내에 연락책으로 왕래하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경성복심법원으로 상고하였으나 서기 1915년 9월 9일 원심판결과 같이 9년형을 선고받고 모진 수모와 학대를 받아가며 영어의 몸어세 풀리자 향리로 돌아와 동지들을 규합 남포청년상회를 조직하여 애국청년후진양성에 진력하였고 경주인 김연제는 주야리에서 출생하여 소시부터 한학을 수학한 학자로 충효사상이 돈독하며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군자금조달책으로 수차 국내에 잠입하던중 왜경에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서기 1922년 임술년에 출옥되어 향리에 돌아와 이씨호제와 다시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여 후학을 일깨웠다. 우리 애국지사들의 얼을 추모하고 민족혼을 심어 놓으신 숭고한 독립정신을 돼새기며 애국애족의 참뜻을 받들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워 영세에 빛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