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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록(友鹿) 류준근(柳濬根) 열사 묘 ./ 위치 : 충남 보령시 청소면 신송리 고잠마을 류준근(1860~1920) 열사는 보령 대천의 녹문에서 태어나 을사조약으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세금 납부 거부 투쟁을 전개함과 동시에 민종식(閔宗植) 의 홍주 의병진에 가담하여 홍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유병장(儒兵將)으로 활약하였으며, 홍주성이 무너지자 모두 피신하기 급급했지만, 열사는 의병관련 기록을 소각한 후 체포되었다. 그 후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다른 8명의 의사와 함께 일본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4년만인 1909년 고국에 돌아왔으며, 늦게 아들을 낳았으나 일제의 호적에 올리지 않는 등 일제정책에 계속 저항하였다. 1912년 고종황제의 밀명에 의해 돈헌(遯軒) 임병찬(林炳瓚)이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을 때는 충청도지역 대표자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1919년 3.1운동때는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여한 후 순종황제에게 복위하여 나라를 독립국으로 통치해 달라는 상소문을 소두(疏頭)가 되어 추진하였으며, 조선민족대표 12인은 독립이 이루어질때까지 투쟁한다는 〈12인등의장서〉에 연명(聯名)하여 총독부에 전달하는 한편,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낭독하는 활동으로 3.1만세 시위확산을 도모하였다. 이어서 우리의 독립열망을 국제정의에 호소하는 파리장서운동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협의하고 전국의 유림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전라도 계화도에 은거하던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찾아가 동참을 권유하였으며, 또한 유림대포의 한 사람으로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1920년 일제의 유교 어용화 정책 반대와 유교 윤리 진작을 위하여 경향(京鄕)의 유림들이 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를 설립하였을 때, 경향과 지역의 유림들은 열사가 보령 지역의 대표가 되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열사는 서울로 가게 되엇는데, 예산 대흥에서 왜경이 행인들에게 전염병 예방주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열사는 왜경에게 예방주사를 맞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그냥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가 얼마 후인 1920년 8월 그 전염병으로 향년 61세에 녹문본가에서 서거하였다. 1977년 정부에서는 건국포장을 추서(追敍)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올려 추서하였으며, 추강(秋江) 백낙관(白樂寬), 만취(晩翠) 황재현(黃載顯), 玉齋(옥재) 白觀亨(백관형),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과 함께 보령 5열사 중의 한 분으로 추앙받는다. 이곳 묘소는 2003년 새롭게 정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