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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김좌진 장군은 서기 1889년(단기 2222년) 음력 11월 24일 충남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김형균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시었으니 그 선은 안동이시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힘이 세었으며 17세때에 벌써 인간의 존엄성을 깨달으시어 문중의 노복들을 속량시켰고 삼천석 추수하던 전답을 소작인들에게 누상분배하여 사회개혁에 솔선수범하시었으며 한국무관학교를 졸업하고서 결수(1910년)국치를 당한후 수십간 되는 자기깁을 제공하여 호명학교를 설립하였고, 광복단사건에 연좌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른뒤 순국한 박상진의사의 뒤를 이어 광복단 단장에 취임하여 활약하다가 왜적의 체포령을 피해서 만주땅으로 망명한후, 길림성 일대를 근거지로 조국광복운동을 전개하며 기미독립선언서의 전신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를 여준, 이동녕, 허혁등 39인의 동지들과 함께 서명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장군이 31세되는 기미년 가을에는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이 되어 왕청현 서대파에 사관양성소를 설치하고 독립군 간부 수백명을 양성하며, 경신 1920년에는 다량의 무기와 군자금을 확보하는 동시 참모에 나종소, 이범석장군등 탁월한 전략가로 상부를 조직하고 사관생400명을 기간으로하여 임전태세를 갖추었던바 이때 일본은 이를 탐지하고서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19사단관라남에 있넌 20사단에 명하여 장군의 북로군정서를 협공케 하였다. 때는 1920년 10월중순이었는데 장군은 청산리 백운평과 천수평사이에 독립군을 매복하고서 10월 19일부터 22일 사이에 불과 1800명의 병력으로 신출귀몰하게 작전하여 10배가 넘는 일본군을 전멸시켰으니 이것이 청산리전투였다. 이같이 큰 승리를 거둔후 식량과 탄환의 부족으로 인하여 장군은 밀산으로 잠시 후퇴하였다가 분산된 무장단체를 통합해 가지고 러시아땅으로 입경하여 그곳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려 하던중 임술년 여름에 흑하참변을 당한후 다시 만주로 넘어가 그해 즉 1922년부터 대한독립군단을 재조직하여 총사령이 되고 아직 노령에 있는 이청천잔군과 홍범도장군을 남만군사책임자에 최진동장군을 동만군사책임자에 각각 임명하는 일방 만주에 있는 혁명민중을 기반으로 신민부를 창설하고 군관학교를 세워 500명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백두산 북녘기슭 삼림지대에 둔전제를 실시하여 국내 진격작전을 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