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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비분강개하던 나머지 자진 순국하는 등 국운이 풍전등화에 이르자 또 다시 홍주에서도 안병찬, 박창로공등 지사들이 민종식공과 더불어 의거를 꾀할때 면암 최익현선생을 대장으로 추대코자 하였으나 면암선생은 전국의거를 위해 전라도로 출진하였다. 이에 호서의사들이 예산땅 광시에 모여 궐기 출진하니 여기서 홍주 병오항일민병의 기치는 하늘을 꿰뚫었다. 당시 의병들은 홍주성을 치기위해 여기 하오령으로 이동해 첫 주둔지를 삼았다. 이때가 바로 1906년 3월 이른 봄으로 의병의 기세는 눈앞에 있는 홍주성을 삽시간에 칠수있었으나 당시 홍주목사 간청에 못이겨 회군한뒤 전부위 이세영공을 맞아 군제를 재편성하고 조련에 임했던것이다. 이 사이 우리의 외교권은 물론 군권의 지휘권마져 빼았던 일본군이 공주에 있던 진위대로 하여금 우리 의병을 청양, 화성에서 치게하니 병오항일의 대접전에 불이 붙었다. 처음 의병들이 열세에 몰리기도 했으나 그해 5월 재건한 의병들은 진천, 감포, 보령, 광주, 결성을 돌며 그 수를 늘리면서 물밀듯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놀랜 일본군은 총병력을 이곳 홍주성으로 집결시켜 대항했으며 일본군의 대포에 맞서 사투를 벌리던 우리의병과 주민들은 끝내 수천이 순사한 나머지 성을 잃케 되었고 후일 희생된 의병의 유골을 수습해 오늘의 구백의총을 대교리에 모신것이다. 우리 후손이 지그 이 비를 병오의병의 첫 주둔지에 세우는 까닭은 선인의 거룩한 순절로 지킨 이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