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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한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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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공 수북선생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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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공 수북선생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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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고 은신하였던바 부의 죄를 자라도 새신 벌한다는 구실로 집에 남아있던 19세된 초립동인 4남 휘 홍모를 체포하여 화성으로 연행하여 사형장으로 여러번 의병들과 같이 끌려가던중 성명 미상의 관군의 구함을 받아 귀가함으로 난을 모면한바 있으나 그후 기우러가는 국력을 따라 민심은 흉흉하고 각지방에서 불한당이 란도적의 무리가 양민의 재산을 약탈함이 극심함으로 자연 세태가 소란하던중 서기 1907년 정미에 궁경면장(광천면장)으로 추대를 받아 부임하사 질서를 만회하고 면민의 복리를 위하여 전심전력하였으며 기민에게 구휼사업으로 기미및 대곡제도등을 베풀어 기아에 허덕이는 민중을 구하며 7개 성상을 보내다 서기 1913년 계축에 그 직을 사임하였고 사양길을 걷는 조국의 운명을 바로잡아 회복하는 길은 오직 신문화를 도입하여 지식 수준 개발화함에 있음을 깨닫고 서기 1908년 무신3월에 사립 덕명학교를 덕정동 자가에 설립하고 교주로서 자저 삼요론을 근본정신으로 후진들의 교육을 위하여 전 가재를 기우려 전심전력하고 서기 1911년 신해에 급기야 광천면 신진리에 교사를 신축하고 규모를 확장하여 경영하다 서기 1915년 을묘 3월에 광천공립보통학교 설립인가가 되자 인계한바이다. 후인들이 그 공적을 기리 찬양하며 서기 1935년 을해 11월에는 광천공립보통학교 학부형일동이 흥학기념비를 현 광천덕명국민학교 교정에 건립하여 송덕하이며 오늘의 광천덕명국민학교는 그 전신이 사립덕명학교의 계승이다. 서기 1919년 9월 기미3.1운동 즉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즉시 가담하여 광천지역을 총책임하여 문하생 박원식을 대동하고 매일 밤 자정 이명동지를 규합하며 독립선언문과(자저의 자유성)이란 전단을 배포하였으며 3월 1일에 동지및 문도들과 더불어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광천일대를 누비며 가두행진등 조국광복을 절규하며 선구적 활동을 하다가 보령경찰서에 체포되어 가진 악독한 고문을 받고 서기 1919년 4월 29일 출판법 위반등의 죄명으로 공주재판소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공주감옥에 투옥되어 복역중 노구의 몸이 장독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신음하며 고초만장의 나날을 겪으시다 동년 12월에 형기를 치르고 출옥은 하였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동지와 문도들의 정성어린 헌약에도 보람없이 종래 긍지의 광복을 보시지 못하고 서기 1921년 10월 30일 다한의 일생을 마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