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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김좌진장군 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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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김좌진장군 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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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기. 이곳 유서깊은 오서산 산자락에 한시대를 의롭게 살다가신 수많은 의사들의 피어린 투쟁의 역사가 있다. 때는 기미년 춘삼월! 만물이 소생하는 활기찬 계절이었지만 이땅에는 일제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뼈에 사무치는 통한과 분노에 쌓여있었다. 당시 중앙고보에 재학중인 이 고장출신 윤익중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하는 독립선언문 선포식과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독립선언문 100여매를 가슴에 품고 귀향하여 윤태병 김상호 김동성 최석한 서갑용 한상철등30여명의 동지들에게 전국적으로 확산되고있는 항일운동의 실상을 설명하였다. 동지들은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한핏줄을 타고난 조선민족으로서 보고만있을수 없다는데 뜻을 같이하고 이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고 자주독립을 쟁취하는데 신명을 바칠것을 결의하였다. 10여일간의 은밀한 회합을 거친 끝에 면내 각동리마다 조직책을 선발하여 인원동원 물자와 자금조달등 임무를 분담하여 조직적으로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제작배부하고 일시에 대대적인 항일시위를 결행할것을 획책하였다. 동년 4월 1일밤 면내 전역의 산봉우리마다 봉화를 올려 거사준비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하고 4월 4일 야음을 틈타 화계 광성 신풍리에서 규한한 주민 100여명이 매봉산에 집결하여 오수남동지의 타종을 신호로 봉화를 올리고 농악을 울리면서 조선독립만세를 목이터져라고 외쳤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연일 계속되는 격렬한 항일시위는 면내 전역에 가속도로 확산되어 마침내 4월 7일 에는 도산리 뒷산에 각부락책임자 인솔하에 300여명의 시위대가 집결하였으며 이자리에서 한상철의 일제만행규탄연설과 독립선언문취지설명이 있은후 일제히 북을 울리면서 만세를 외쳤다. 노도처럼 흥분된 시위행렬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자유를 울부짓는 함성은 지축을 흔들었다. 이들은 여세를 타고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직원들도 항일운동에 동참할것을 호소하였으나 불응하고 도주함으로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은 면사무소에 난입하여 행정은 완전히 마비되고 항일운동은 날이 갈수록 격렬해지자 일제는 무장군경을 장곡면일대에 집중배치하고 무차별한 총격과 잔인무도한 사태진압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시위행렬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알몸으로 저항하다가 드디어 많은 사상자를 ㄴ고 200여명의 인사들이 일경의 쇠사슬에 묶이어 홍성으로 압송되었으며 그후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져서 온몸이 피멍으로 얼룩지는 잔혹한 고문을 당한끝에 1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