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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사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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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광무10년(1906) 윤달 4월 9일밤 왜군이 홍주(홍성)의 동문을 공격하였다. 우리의 의병과 장졸은 이에 총격하여 힘써 싸웠으나 새벽에 모두 전사하였다. 세앙인은 이 일을 홍주에서 일어난 병오년의 일이라 한다. 그 이전 을사년(1905) 겨울 일본이 5적대신(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과 연계하여 보호조약을 맺어 국권이 느닷없이 일본에게 넘어갔다. 정부.민간의 충절과 의리있는 인사들은 대중을 모아 사투를 맹세하였다. 마침 고종의 밀지를 받아 남으로 내려온 자가 있어 기세를 모아 밀지를 따랐다. 의병이 남포를 기점으로 홍주에 들어가 부서를 처음 정하고 왜적이 쳐들어와 성에 다다름을 알지자 주장이 달아났다. 지난 항쟁사로 예를 들어도 적을 만난 장졸을 거느리지 못하면 부하들도 스스로 정비하지 못했다. 오직 이번에 제어한 일은 의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마다 나라잃은 슬픔에 사무쳐 답답한 심정이 가슴에 가득하여 칼날에 눈빛이 번득인지라 왜적을 만남이 10년간의 한 남긴 원수같았다. 그러나 우거진 숲속에서 갑자기 적을 만났의, 누가 이를 막을 수 있었겠는가. 이 일로 니날 성에 남은 의병들은 줄지어 선 대오가 장엄하였고 손발이 매우 날렵하였다. 이는 사람에 의해 제어한것이 아니고, 정의에 의한것이다. 성재한, 채광묵, 전태진, 서기환등이 의병 영관이 되었다. 어떤이가 재한에게 "주장이 가면 앞으로 어떻게 합니까?"라 하니, 재한이 그를 꾸짖어 말하기를 "남아가 여기서 머리와 귀를 베일지언정 어찌 왜적에게 굴복하랴"고 하였다. 광묵, 태진, 기환등도 모두 뜻이 같아 더욱 싸움에 힘쓰게하니 병사들도 힘써 그 명을 따랐다. 이는 영관을 따른것이 아니라 정의를 보고 따른것이다. 의병이 보유한 병기는 모두 낡았으나 왜적의 대포의 위력은 천지가 진동하여 앞뒤의 건물들이 전복되고 뒤흔들렸다. 의병들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왜적과 싸워 크게 살상시켰다. 이에 적장 토방원지조와 목태랑이 모두 죽었다. 한참 싸움이 벌어지때 달빛이 밝다가 갑자기 누런 안개가 짙게 끼어 지척간도 알아볼 수 없었다. 적은 군사를 늘려 양면으로 공격하여 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이때 의병으로 죽은이의 시신은 언덕만치나 쌓여 이튿날 이를 가져다 골짜기의 구덩이에 매장하였다. 당시 왜적의 기세가 더욱 치열하여 근방사람들도 잡혀 시체더미난 늘어나 길이 막힘을 볼수 있었다. 시신이 자기집에 보내진 자는 거의 없었다. 그들의 성명도 알지 못해 인명수가 중복되어 밝혀지지 않은자는 어떤이는 7,8백 또 어떤이는 5,6백명이라 한다. 지금도 그 날이 되면 성곽 안팎으로 기제를 지내는 밤의 곡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온다. 대저 을사변란 이후 그 지역 의병은 계속 일어나 모두 각기 흩어져 행동하였다. 의병들이 성을 지켜 큰 왜적을 대한한것은 오직 홍주의 일이었는데, 졸지에 일군에 전멸하였다. 비록 비참하였지만 그 주민들의 충정에 감동하여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왜적은 더욱 포악해져 우리 의병은 이에 맞추어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 당시 형세는 의병이 각자 흩어져 행동한것과 성을 스스로 지킨일인데, 모두 승리하지 못한 계획이었다. 한치의 칼날로 암석을 찔러 잘리게 된것은 칼날뿐이었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고도 알 수 있는 일이니, 홍주의 의병과 군자들이 어찌 당시 형세가 그와 같았음을 몰랐겠는가! 그 싸움에서 이기지 못할줄 알면서도 오히려 왜군과 싸워 전사했으니, 이는 의가 극진하고 인이 지극한 것이다. 오직 그리하여 의병과 왜군사이의 강약과 예리, 노둔함이 더울 차이가 있었고, 여려군자들의 정의가 더욱 밝아져 해나 별이 오랠수록 몹시 빛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