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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는 나라를 그냥 두고만 볼것이던가 우리 역사는 결코 그렇지 않다. 나라를 붙들려고 목숨을 바치기도 몸을 던지기도하였다. 국난을 당하면 임금께 상소도 민족에게 고하기도 나라밖에 외치기도 하여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낱낱이 알려 기어이 국권을 찾고야 말았다. 외롭고 괴롭게 싸우던 그 분들은 비록 살아서는 보지는 못하였으나 마침내 피어린 열매는 맺어 살아있는 후손들이 그 덕택을 입었으니 어찌 거룩하지 하니하랴. 우리는 여기서 지산 김복한선생을 뚜렸한 분으로 꼽지 아니할수 없다. 선생은 안동인이니 병자호란에 강도에서 순절한 문충공 선원선생 상객의 12세손이다. 서기 1860년 철종 경신 7월 24일 홍주 조휘곡에서 나니 골격이 준위하고 의용이 헌앙하며 경서에 박통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의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을미에 왜적이 국모를 시해하매 복암 이공 설, 규당 안공 병찬과 함께 홍주목사 이승우를 권유하여 의병을 일으켜 일제를 토벌하고 복수를 계획하다. 이승우의 배반으로 일군에게 체포되어 이듬해 정월에 서울로 압송 투옥되었다가 황명으로 풀려나서 성균관장 중추원의관이 제수되었으나 저 원수를 갚지 못하였다는 상소하고 나가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매 지용, 제순, 완용, 근택, 중현등 5적을 청참키위하여 상소하다가 피체되었다. 1906년 병오에 민공 종식이 홍주에서 거의하자 일제는 선생이 이를 관섭한다고 의심하여 서울로 압송하고 한성경무청에 구금하였다. 이어 1907년 정미에 다시 일병에게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도중 일병이 선생을 살해하려하매 같이 가던 사람이 말려 생명을 겨우 보전하였고 1910년 경술에 국치를 당하자 죄폐인으로 자진하였다. 1919년 기미에 3.1운동이 일어나니 곽공 종석등과 협의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장서를 보내 종국의 회복과 일제의 기신배약과 국모시해의 변과 민족의 울분과 자주독립을 개진하니 유림 137인이 서명하였으며 마침내 이 장서가 발각되어 공주 감옥에 피구되었다.1924년 갑자 3월 29일에 졸하니 문인지구가마자가 60여인이었으며 건국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아아 선생은 비록 목숨을 끊지 않았으나 국가와 민족을 위한 그 정성은 먼저 몸을 던지지 않고서는 있을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지금 국권을 누리며 할수 있는것이 모두 선열의 피로 이루어진것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야 할것이다. 이에 선생의 정충대의와 극민공업을 길이 전케하기위하여 추양사앞에 이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