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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사총 성역사업조성기 악날한 일본군이 배일노선을 고수하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이어 단발령의 강행과 을사보호조약의 체결로 민심이 날로 흉흉해지자 이에 분개한 홍주고을 충의열사들이 분연히 창의봉기하였으니 이는 조선조말 주권회복을 선도한 항일의병의 시초였다. 구국일념에서 죽기를 맹세하고 적수공권으로 항전하였으나 1906년 병오 음 4월 9일 여명에 중과부적으로 순의하였으니 산천도 경탄통곡할 참사였다. 900여 의사공들의 시신은 구국의 원한도 풀지 못한 채 산격 위에 ○○만 오가는 음곡에서 40여년간 풍상설한에 폭로되었으니 진실로 가슴을 외이는 통한이었다. 민족이 있어도 강토가 없었던 왜정때에는 산화한 선열들의 유골을 수묘할 겨를조차 없었다가 8.15광복을 맞아 산재한 황예를 수심하여 심감합장의 혜를 갖춘 후, 사당에 위패를 봉안하고 구백의사총이라 하였다. 1991년 12월 총 37억원의 재원을 마련 만여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묘역 정비, 사당 보수, 석물 조성, 삼문 신축과 부속 공사까지 완성하여 말끔히 단장하고 이 성역을 홍주의사총이라 개칭하였다. 이 역사적인 사업은 살신으로 호국한 영령들의 넋을 영원히 애도하고 그 순국정신을 계승함으로써 만세토록 호국할 수 있는 충절의 지표가 될 것이다. 1992년 12월 30일 홍성군수 이상선 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