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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의병주둔유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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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신음하는 민족과 조국을 하하자는 단성으로 가족까지 버리고 망명학셨다. 적수공권으로 창설한 무관학교에서 양성한 기간사관을 선두로 동양침략의 야욕을 품고 중국에 진주한 일군 주력의 가납연대를 청산리에서 일격소탕하니 청사에 빛나는 지도자이시었다. 이로서 세계대전 종식의 원력이 되었으니 세계는 환호하고 일왕은 통곡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각료임명에도 거절하였던 장군의 웅지를 누가 예측하였으며 정서판단의 정도에 온 국민은 감격하였다. 장재웅재포다 민족의 영웅이시로다. 한족 유일당 촉성회를 비롯 재만 조선무정부주의연맹등을 민족통일연합체로 구성하여 구국운동에 전렴하다. 1930년 음 12월 25일 하오 2시 직영하시던 중동로산시 참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 청년당원의 흉탄으로 기개세하던 40세의 장년장군이 산화순국하시니 산천초목도 애도하고 천지가 진동하는 민족의 명인속에 사회자으로 안장하였다. 고국을 그리던 장군은 지하에서 분성분하였다. 가문의 종도를 지키던 열부도 년로서거하니 정부에서 특배한 기차로 장군과 함께 운구하여 현위치인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51번지에 면례합장하고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으셨다. 위인의 사당을 건립하여 선열을 추봉하는 례제는 국전일뿐만 아니라 애국애족의 정서함양과 교육도장으로 전래해온 예곡임에도 중화를 앞선 동방예의의 나라에서 순국하신지 71년 광복된지 5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전의를 갖추게되었으니 감개무량하고 속죄의 정을 느낀다. 이는 위정목사의 농석감찰과 동역한 지적이다. 백두대간의 지맥인 차령산기를 이어받은 중왕의 가야산과 삼준산의 의 용기서리고 와룡천이 회류하는 영지에 1991년 총6837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생가복원등을 시작으로 10여년의 속속공사끝에 2000년을 마지막우로 임야 2880평을 매수정리하고 삼준산운봉을 향하여 선기걸향으로 정침하니 와용망천격이다. 24평여 2익공팔작집의 전통 한식와가로 사당을 신축하여 기념사업회의 영정봉안과 장군의 아호를 받들어 백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