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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여 한인(韓人)들에게 대한 보복학살을 자행하자 장군(將軍)은 막하 장병을 이끌고 소만국경(蘇滿國境) 지대(地帶)의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때 십여개의 독립군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組織)하였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을 겪고나서는 북만주(北滿洲)로 이동하여 동령현을 근거로 흩어졌던 독립군부대를 수습하고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다시 조직(組織)함으로써 전력(戰力)을 강화(强化)하였다. 1925년에 이르러 북만주(北滿洲) 지대(地帶)의 여러 독립운동단체(獨立運動團體)가 신민부(新民府)로 통합(統合)되자 장군(將軍)은 군부위원장겸총사령관(軍部委員長兼總司令官)의 중책(重責)을 맡고 목성현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設立)하여 부교장(副校長)으로서 독립군 간부교육에도 관계하였으며 1927년에는 이중삼(李重三)등의 특수공작대을 국내(國內)에 침투시키기도 하였다. 신민부(新民府)에 내분(內紛)이 일게 되자 장군(將軍)은 김승학(金承學) 김동삼(金東三) 등과 혁신의회를 따로 조직(組織)하고 유일독립당재만영진회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1929년(一九二九年) 7월(七月) 길림(吉林)의 국민부(國民府)와 더불어만주(滿州)에서의 한민족통합(韓民族統合)을 추진(推進)하여 해림(海林)에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결성(結成)하고 주석(主席)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장군(將軍)은 장기(長期)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의 역량강화(力量强化)와 국내진격작전(國內進擊作戰)을 펴기 위한 준비에 박차(拍車)를 가(加)하였다. 백두산(白頭山) 기슭 산림지대에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고 영농법을 지도하여 재만동포(在滿同胞)들의 민주안전(民主安全)을 꾀하고 무장독립전쟁의 물질적(物質的) 기반을 강화(强化) 하기에 힘쓰는 한편 동포사회(同胞社會)의 분열(分裂)을 야기하던 공산주의(共産主義)에 대한 비판활동을 병행한 것 등은 그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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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항일무장독립전쟁의 기반조성과 민족단결(民族團結)에 진력하며 국내진격작전을 준비해오던 장군(將軍)은 1930년 1월 24일 음 1929년 12월 25일 북만주(北滿洲) 해림(海林) 중동(中東) 노산시점(路山市岾)에서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 박상실(朴相實)의 흉탄(凶彈)에 의해 41세(四十一歲)를 일기(一期)로 조국광복운동(祖國光復運動)의 지도자(指導者)요 무장독립전쟁의 영도자(領導者)로서의 일생(一生)을 마쳤다. 장군(將軍)의 장례는 장군(將軍)을 모시던 재만동포(在滿同胞)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엄숙하게 집행(執行)되었고 이억땅 만주(滿洲)에 안장(安葬)되었다. 그러나 그후 장군(將軍)의 유해(遺骸)는 방물장사를 가장(假裝)한 미망인(未亡人) 오숙근 여사(女史)에 의해 비밀리에 수습되어 홍성군(洪城郡) 서부면(西部面) 이호리(利湖里) 선영(先塋)에 모셔졌다가 광복 후(光復 後)인 1957년(一九五七年)에 오숙근(吳ㅇ根) 여사(女史) 별세(別世)하자 현묘소인 보령군(保寧郡) 청소면(靑소面) 재정리(才井里)로 합장(合葬)되었다. 우리 정부(政府)에서는 청사(靑史)에 길이 빛난 장군(將軍)의 무장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 지도자(指導者)로서의 공훈(功勳)과 숭고(崇高)한 민족정신(民族精神)을 높이 선양(宣揚)하여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建國勳章 大韓民國章)을 추서(追叙)하였다. 일찌기 소년가장시절(少年家長時節)에 사회개혁(社會改革)의 의지(意志)를 실천적으로 드러냈고 국운(國運)이 가물거리던 한말(韓末)에는 애국계몽운동에 열과 힘을 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