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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함으로써 조국광복(祖國光復)을 위한 무장투쟁(鬪爭)에 투신(投身)하였다. 또한 장군(將軍)은 김교헌(金敎献) 등 36인(三十六人)의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지도자와 함께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여 내외(內外)에 조국(祖國)의 독립(獨立)을 선포(宣布)하였다. 그리하여 장군(將軍)은 무장독립군의 조직과 독립전사의 군사교육(軍事敎育)을 강화(强化)하는 등 항일무장독립전쟁을 영도(領導)하게 되었다. 1919년의 3.1운동(三一運動) 이후 이상룡(李相龍), 조성환등이 조직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의 참모로 활약하던 장군(將軍)은 서일(徐一)을 중심(中心)으로 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단)이 조직됨에 그 사령관직(司令官職)을 맡았다. 같은 시기(時期)에 상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어 해외(海外)에서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중핵을 이루게 되면서 군정부(軍政府)로 개명되었던 대한정의단계열의 독립군(獨立軍)을 규합하여 북로군정서로 개편하고 총사령(總司令)이 되어 간도왕청현에 독립군(獨立軍) 본영(本營)을 개설하였다. 1920년 2월에는 사관련성대의 교장직(敎長職)을 맡아 300여명(三百餘名)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가 하면 일개연대의 병력(兵力)을 가진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만주에서의 무장독립군의 전력(戰力)이 날로 강화(强化)되자 이에 위협을 느끼게 된 일제(日帝)는 만주의 중국군벌(中國軍閥)과 야합(野合)한 후 2개사단의 병력(兵力)을 간도지방(間島地方)에 투입(投入)하여 군사작전(軍事作戰)을 펴게 되었다. 이때에 장군은 이범석 장군 등 1천8백여 독립군을 이끌고 1920년 10월 화룡현의 청산리(靑山里) 백운평(白雲坪)과 천수평(泉水坪) 일대(一帶)에서 5일간(五日間) 격렬한 전투를 벌여 무장독립전쟁역사상(獨立戰爭歷史上) 최대(最大)의 승리인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을 거두었다. 이에 놀란 일본군(日本軍)이 대부대를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