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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將軍) 기적비 장군(將軍)은 일찌기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강화성(江華城)에서 전사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10대손(十代孫)인 부친 김형규(金衡奎)와 이씨부인(李氏夫人) 사이의 차남(次男)으로 1889년(一八八九年) 음력 11월(十一月) 24일(二十四日) 홍성군(洪城郡) 갈산면(葛山面) 행산리(杏山里)에서 태어났으니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요 자(字)는 명여(明汝)이며호(號)는 백야(白冶)이다. 세살 되던 해 부친(父親)을 여의고 편모슬하(偏母膝下)에서 자라났으나 천성(天性)이 호방하고 의지(意志)가 남달랐던 장군(將軍)은 한학(漢學)에 힘쓰는 한편 무예를 갈고 닦으며 장성(長成)하였다. 친형(親兄) 경진(景鎭)이 15촌수인 덕규(德圭)에게 출계)하자 이천석(二千石) 재산가의 가장(家長)이 되었다. 14세(十四歲)때에 해주오씨(海州吳氏)가문의 숙근 규수를 맞아 성혼(成婚)하였으며 16세(十六歲)에는 소년가장(少年家長)으로서 자기집의 노비삼십여명(奴婢三十餘名)의 노비문서(奴婢文書)를 불태워 그들의 신분(身分)을 해방(解放)시켜주고 또한 소작인(小作人)들에게는 농토(農土)를 무상(無償)으로 분배(分配)해 주는 등 사회개혁(社會改革)의 의지(意志)를 몸소 실천(實踐)하였다. 조국(祖國)이 일제(日帝)에 의한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국운(國運)을 위협(威脅)받던 1905년 장군(將軍)은 약관 18세(十八歲)의 나이로 구십여간(九十餘問)의 자기집에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民族敎育)에 힘쓰는 한편 대한협회(大韓協會) 홍성지회(洪城支會) 호서교육회(湖西敎育會)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등 여러 애국계몽단체를 차례로 조직(組織)하여 국권수호운동(國權守護運動)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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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에는 보다 더 적극적(積極的)인 구국투쟁(救國鬪爭)을 펴기 위하여 활동무대(活動舞臺)를 서울로 옮겨 사범학교부속 고아원의 총무(總務)로 일하면서 한성신문(漢城新聞) 이사(理事)의 직책을 맡아 언론투쟁(言論鬪爭)에도 관계하였다. 또한 항일의병(抗日義兵)들의 연락거점으로 활용(活用)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이창양행(怡昌洋行)을 국경도시인 신의주(新義州)에 염직회사(染織會社)를 설립운영(設立運營)하였다.1910년에 군사력(軍事力)을 앞세워 한반도(韓半島)의 무력점령(武力占領)을 기원(企圓)하던 일제(日帝)에 의해 나라를 빼았기게 되자 국내(國內)에서 전개해오던 국권수호투쟁(國權守護鬪爭)의 한계를 깨닫게 된 독립투사(獨立鬪士)들은 독립전쟁기지(獨立戰爭基地)를 해외(海外)에 마련하고 장기적(長期的)인 항일독립투쟁(抗日獨立鬪爭)을 꾀하게 되었다. 장군(將軍)은 안승구(安承龜) 민병옥(閔丙玉) 조형원(趙亨元) 김찬수(金燦洙) 등과 함께 이에 필요한 군자금(軍資金)을 조달(調達)하다가 일제(日帝)에 피검되어 1911년 2월부터 2년 6개월간 서울의 서대문(西大門) 형무소(刑務所)에서 옥고(獄苦)를 치렀고 출옥(出獄)후(後) 고향(故鄕) 홍성(洪城)에서 다시 체포되어 10개월간 일제헌병부대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朴尙鎭)이 주도(主導)하는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가 조직(組織)되자 장군(將軍)은 이에 합류하여 이석대(李㙽大)의 뒤를 이어 부사령관(副司令官)으로 활약(活躍)하였으며 1917년 9월에는 총사령관(總司令官) 박상진(朴尙鎭)의 명(命)을 받고 중국(中國) 동북지방(東北地方)에서 무장독립전쟁(武裝獨立戰爭)을 수행할 요원(要員)을 양성할 목적(目的)으로 망명(亡命)하여 목단강지역(牧丹江地域)에 독립군사관학교(獨立軍士官學校)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