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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김좌진 장군 백야 김좌진 장군(1889-1930) 백야 김좌진 장군은 1889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1907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김좌진은 고향에서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교육하였으며, 기호흥학회 지부를 조직, 활동하였다. 또한 1907년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였고, 1908년에는 노백린 등과 함께 신민회의 청년기구인 청년학우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자 김좌진은 이창양행(行)을 설립하고,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비밀 연락을 하기도 하였다. 1911년 독립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루었으며, 1915년 박상진 등이 조직한 비밀조직인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 부사령이 된 김좌진은 당시 만주의 독립군 단체인 중광단으로부터 독립군을 양성하여 달라는 요청에 의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7년 만주로 망명한 후 대종교에 가입하였으며, 3.1운동의 전주곡이 된 대한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서 서명하기도 하였다. 1919년 12월 대한군정서의 총사령관에 선임된 김좌진은 총재 서일을 보필하는 한편,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독립군 간부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1920년 10월에는 독립군 소탕을 명목으로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을 청산리 계곡에서 격파한 이른바 '청산리대첩' 을 거두었다. 이후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북만주 밀산으로 이동하고, 그 곳에 모인 10여개의 독립군들을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김좌진은 김혁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고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에 선임되어 활동하며, 또한 1925년 10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으나,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위하여 취임을 사양하기도 하였다. 1927년 당시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등이 일제에 의해 체포되자 신민부를 재정비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28년 신민부·참의부·정의부 등 3부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9년 신민부와 정의부의 일부를 통합하여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에 취임한 김좌진은 독립운동의 전개와 동포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힘쓰다. 1930년 1월 박상실에 의해 암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