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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冶 金佐鎭 將軍 事蹟碑(백야 김좌진 장군 사적비) 국가대란에 충신열사는 입절사의하여 청사에 빛나는데 일적의 침략에 백야 김좌진 장군이 그러하다. 좌진은 장군의 휘, 자는 명녀, 호는 백야니 안동인으로 병자호란에 강화에서 순국하신 선원 김상용 선생의 11대손으로 고종 26년 을축 11월 24일에 홍성군 갈산 행산리에서 낳았다. 어려서부터 호방하고 기골이 웅위하고 의지탁월하며 취학함에 앙강부약이란 기치를 내걸고 일마를 익혀 비범한 바가 있었다. 15세에 가장이 되자 노적을 소각하고 재산을 노비에게 분급하니 이는 동방 최초의 노예해방이었고, 90여간의 거택으로 호명학교를 세우고 기호흥학회를 만들어 수재를 선발 유학케 하였다. 20세에 황성신문 사장과 경성고아원 총무가 되고 이창양행 염직회사를 경영하면서 국내외의 연락처로 이용하며 원근 동지를 규합하고 북간도에 사관학교를 설립코저 모금타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출옥 후 애국지사와 광복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으나 동지들이 체포 처형되자 장군은 부득이 만주로 망명하였다. 무오년에는 재만 독립운동자 39인이 독립선언서를 선포하였는데 이는 기미선언보다도 1년 앞선 것이었고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옥청서대파에 사관연성소를 설립 400명의 사관과 1개 연대의 보병을 양성하여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경신 10월에 시베리아로 향하는 3천 병력의 일본 가납연대를 화룡 청산리에서 유인하여 연대장 이하 천수백명을 사살하고 천여명을 전상케하는 한편 작전의 묘로 운무 중에 적군끼리 싸우게 하여 막대한 사상을 내게 하는 대승리를 걷우어 독립전역상 최대전적을 세웠다. 이후로 군소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작성한 뒤 사령관 부장 등 직을 역임 만주와 노령을 왕래하면서 활약하였고 그후 기사년엔 군무소 독변 겸 북만군정서 총사령과 한족총연합회 주석을 역임하면서 재만동포의 민생과 교육문제에 힘쓰는 한편 중국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도모하였다. 이러던 차에 뜻하지 않게 경오 1월 26일에 고려공산청년당원의 흉탄에 일세의 애국투사가 이역만리에서 서거하였다. 아아 이 무슨 어처구니 없는 짓인가. 명인이 온겨레의 가슴을 울리고 말았다. 그러나 장군이 가신 뒤 유해는 고국산천의 선영하에 안장되었고 그 유지를 받들이서 온국민의 독립의지와 항일투쟁이 날로 높아가서 마침내 일적을 물리치고 광복을 이룩하였고 뿐만 아니라 임인 3월 1일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고, 계해년엔 1억여원을 들여 높이 30척이나 되는 웅장한 동상을 세웠으니 지하에 계신 장군의 혼이 어찌 통쾌하지 않으시겠는가. 장군의 생애는 비록 불운하고 짧았으나 장군의 영혼은 평안하고 영원할 것이니 어찌 다행치 않겠는가. 이제 그 업적을 약술하여 단갈에 새기거니와 장군의 위업이 어찌 졸문으로 제민하겠는가. 다만 유적지에 표식하여 후인의 관감지자로 삼고저 할 뿐이다. 대한민국 광복 후 42년 1월 일 충남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한양 조종업 근식 속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김충현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