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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쟁에 크게 전공을 세우다. 한때 국내에 잠입하여 조종국, 곽한일 등과 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지하운동을 벌리다가 일경의 추적을 받고 재차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북경에서 영위대학 의학부에 재적 중 이시영, 조성환, 신채호 등과 결의하고 독립군에 가담하여 군자금 조달과 조직책을 맡다. 대학을 족업한 후에는 노령의 신한촌의 고평장군막하에서 독립군 중장으로 활약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다. 다시 만주로 돌아와 약국을 경영하면서 군자금 조달을 획책하다.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서간도에서 대한독립단이 결성되자 신흥무관학교에서 병학을 강의하고 김진동이란 가명으로 김환과 더불어 국내에 잠입하여 통신및 동지규합과 군자금조달을 목적으로 활약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3년을 복역하는 동안 일본 총독의 순시를 계기로 옥중투쟁을 벌려 심한 고문을 받고 5년의 옥고를 치른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다. 김동이라는 가명으로 재차 전북에 잠입하여 김재석의 비호를 입어 지하운동을 벌리다가 일경에 체포도어 3년을 복무하다 출옥 후에는 전주 효자동 셋방살이에서 악형의 여독으로 신체의 장애를 이르키어 신고하던 중에서도 일제의 감시를 받았으나 끝나 일제의 호적을 거부하여 독자인 용석은 승려생활로 은둔하다 미일전쟁말기에 업어들자 일제의 발악으로 지리산에 잠적하여 동지들의 유족을 끌어들여 신변을 보호하다 조국해방을 맞이하여 전주 구제로 돌아오다. 한때 김구주석과 건국운동 및 남북통일정부수립에 진력하였으나 주석이 불한의 흉탄으로 서거하자 분단된 조국을 개탄하다가 세상을 뜨다. 의사의 열열한 우국충렬은 민족천추의 귀감으로서 우리 고장의 자랑이다. 이에 비를 세워 빛나는 공적을 길이 받들고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