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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 장군 추모의 글 장군의 본관은 밀양이고 이름은 정식 호는 초산이며 화중은 그의 자이다. 1861년 6월 12일 정읍시 과교동에서 아버지 호연 어머니 평강채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이웃 음성리로 옮겨 살았는데 가정이 풍족하여 학문에만 정진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때 전주사고의 왕조실록을 내장산으로 피난시킨바 있는 의사 孫寒溪(손한계)의 후예인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매사 공정하여 남에게 추앙을 받았으나 세태가 뜻가 달라 일신출세의 뜻을 버리고 처남인 유용수와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심신수도에 정념하였다. 그러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기로 다짐하던중 동학에 입교하였다. 입교후 2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부안과 정읍에서 포교활동을 하다가 무장으로 옮겨 지금의 고창군 무장면 덕림리 양실에 접소를 두고 교도들을 지도해 교셍는 몇년안되어 전라도 일대를 압도했다. 당시 나라는 삼정의 문란으로 인하여 안으로는 민란이 끊이지 않았고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침략이 위태로웠다. 1894년 정월 농민봉기를 주도했던 전봉준장군의 혁명론에 뜻을 같이하여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이해 3월 역사적인 백산봉기를 이끌었다. 3월 봉기의 원동력이 되었던 손화중 포는 이해 7월 최경선과 나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도했으나 공주패전으로 대세가 불리하자 10월 7일 광주성으로 들어가 12월 1일 농민군을 해산하고 고창군 부안면 안현리 제실에 으거하던중 12월 10일 이봉우의 고발로 관군에게 잡혀다. 1895년 3월 30ㅣㄹ 서울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치니 향년 35세였다. 장군은 끝까지 내백성을 위하여 힘을 다했는데 사형을 당해야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호령하며 임종을 맞았다 하니 그의 기는 천추에 길이 전할것이다. 이에 그의 서세 103주년을 맞아 그 뜻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 1998년 11월 7일 최현식 짓고 여태명 씀. 손화중 장군을 추모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