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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의 요람이요, 법조인의 성지 오래 전부터 우리 고장 전북은 "청백리의 요람이요, 법조인의 성지"라고 불리어져 왔다. 우리나라 근대사법이 일백년의 역사의 탑을 쌓아오는 동안 법의 정의로 터를 닦고, 사법의 양식으로 기틀을 세운 이 나라 대표적인 법조인 세분이 모두 우리 전북에서 태어나신 데서 비롯된 말이다. 이 세 어른은 한국 법조의 대부로 너무도 유명한 가인 김병로선생을 비롯하여 검찰의 양심 화강 최대교선생, 그리고 법복입은 성직자 바오로 김홍섭선생이시다. 고매하신 인격, 대쪽같은 성품, 하늘을 찌를듯한 기개, 청렴했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가지도 모자람이 없는 법조인의 사표였고, 이 나라 법조계의 표상들이시다. 그리하여 이 세어른을 "한국 법조계의 3성"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이 고장 순창군 복흥면에서 태어나신 가인 김병로선생은 젊은 시절 항일의병으로 참전도 했으며, 나라를 되찾아 건국 후 초대 대법원장이 되셔서는 "법관은 비록 굶어 죽을지언정 절대로 부정을 해서는 안된다"고 산하 각급 사법종사자들에게 강조하는 한편, 당시의 독재 정권에 맞서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내서 그대로 민주사법의 주춧돌이 되신 어른이시다. 또 익산의 감기면 출신인 화강 최대교선생은 건국후 혼란이 자김했던 시절, 전주지검, 서울지검의 검사장을 역임하는 동안 이 나라 검찰의 양심이었고 기개였다. 독재자의 압력에도 굴함이 없이 부패한 고관들을 기소하는 등 많은 일화를 남겨 오늘날에도 대쪽같은 검사이며, 또 검찰의 용기요, 귀감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김제의 금산면에서 생을 얻은 바오로 김홍섭선생은 전주지검, 광주고법, 서울고법등의 법원장을 거치면서도 청빈하게 살아오신 분으로 유명하시다. 유달리 깊었던 신앙심에 바탕한 그의 일생은 법관이기 전에 차라리 성직자였으며, 그 같은 삶으로 인하여 우리 나라 법조계에서는 "사형수의 대부"라고 불리우며, 오늘날에도 길이 추앙을 받고있다. 한 고장에서 한 분의 존경스러운 인물을 탄생시키기도 어려운 일이거늘, 우리나라 법조계의 스스이 되신 세 법조인 모두가 이 고장에서 태어나신 일은 결코 예사스런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세 어른은 그대로 "우리 고장 전북의 자존심이요, 긍지이며, 우리의 영원한 명예"가 아닐 수 없다. 이에 우리는 이 세 어른의 챙백하고 고귀한 삶과 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여 그 정신을 기리고, 또 후대들에게 영원한 귀감이 되게 하고자 전주에 동상을 세워, 우리 고장을 한국 법조의 성지로 가꾸고자 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