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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민중이 주인이 되고자하는 자랑스런 항거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그 위에 우뚝 선 동학농민전쟁이 그렇고 그 지도자로 살다간 김개남 장군이 그렇다. 4186년 전라도 태인땅 지금실에서 김씨댁 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김개남 장군은 불꽃같은 의지로 보국안민과 척양척왜의 기치를 내걸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다 죽은 동학농민전쟁의 지돠중 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해 민족의 앞날을 걱정을 하고 있던 김개남장군은 봉건왕조의 부패와 수탈로 민심이 흉흉하고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침탈로 나라가 위태롭자 4227년 3월 전봉준 손화중 장군과 함께 국가의 안위를 좌시할 수 없어 억조창생의 뜻을 모아 의기를 들고 보국안민을 위해 사생을 맹서하는 창의문과 창생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하는 격문을 띄우며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다. 동학농민군은 황톳재와 황룡강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갈재넘어 원평 금구를 거쳐 4월 전주성을 점령했다. 이어 전주화약을 맺은 뒤 김개남 장군은 남원성을 중심으로 김강소를 설치하고 전라좌도를 평정 폐정개혁을 추진했다. 이때 영주란 본명을 남쪽을 연다는 뜻의 개남으로 바꿨다. 그해 9월 2차기포때 관군의 요충지인 청주병영을 공격했으나 패하여 통한의 눈물을 삼키면서 태인으로 내려와 재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임병찬의 고발로 붙잡혀 12월 전주성 서교장에서 목이 잘려 효시됬다. 그 나이 42 시신도 거두지 못했고 따라서 무덤도 없다. 구천에 떠도는 그 고혼은 어디서 통곡을 하고 있는가.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지 어언 아흔아홉해 그의 뜻을 기리고 맺힌 한을 풀고자 뜻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돌을 세우니 진흙 속에 핀 저 연꽃이 더욱 아릅답듯이 그의 넋은 역사를 비추는 횃불로 되살아날 것이며 찬란한 태양으로 이땅에 더욱 빛나리라. 4326년 5월 3일 김개남 장군을 추모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