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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황(1858~1916)은 서울출생으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 진압군의 지휘관으로 죽산부사및 장위영영관,양호도순무영 우선봉장으로 임영되어 목천 세성산, 서산, 유구, 해미, 논산 황화대, 전주, 원평, 태인, 장흥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전투에서 동학농민군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진압하는데 앞장섰다.특히 보은 장내리의 민가 수백 채를 불사르고, 장흥에서는 동학농민군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을 전개하였으며, 논산 황화대 전투에서는 동학농민군의 시체가 눈에 걸리고 발에 챈다고 진중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여우사냥'으로 불렸던 명성황후 살해사건에 훈련대 1대대장으로 우범선, 이진호, 이주회 등과 함께 조선인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참여하여 일국의 국모를 살해하여 불태우는 엽기적인 범죄행각에 가담하였다. 사건 직후 일본으로 도주했던 이두황은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 아래 중추원 부참의로 화려하게 복귀하여쏘, 1908년 전라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이른바 일본의 '남한토벌대'로 부리던 호남지역 의병운동을 초토화시키는데 적극 앞장섰다. 1910년부터 1916년 사망할 때까지 전라북도 도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일본의 식민통치 하수인으로 복무하였고, 재밍중 지방토지조사위원장을 겸임하며 일제의 토지 수탈에 협력하였다. 일제는 이런 이두황에게 한국병합기념장,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유공장, 천황즉위기념 대례기념장, 훈3등서보장등을 수여하였다.이두황 사후 100년, 역사의 이름으로 이 단죄비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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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만의 단죄, 친일 반민족행위자 이두황 정의가 불의에 역으로 청산당하고 민족을 배신한 세력들이 역사의 주인노릇을 한 나라. 매국배족의 후예들이 아직도 역사를 분탕 질하는 나라. 보국안민, 척왜양창의의 갑오년 동학농민군의 비원과 국권침탈에 맞섰던 항일 의병들의 한을 모아 100년 세월, 호남의 수부 전주시가지를 바라보며 기린봉아래 고이 잠들어 있는 역사와 민족의 죄인, 충량한 황국신민 이두황을 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