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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유학의 저명인으로 1905년 전주에 옥류정사를 개설하고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여 명성을 떨쳤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렬되자 단식으로 항거하고 토역선참(討逆先斬)의 격문을 작성하여 도처에 붙이는 등 항거하였다. 1912년 호남창의대장 이석용(李錫庸)이 전남북 양도에 걸쳐 일군과 항전을 계속하며 독립밀맹단을 조직하고 각 지역을 분담하여 활동할 때 전주 지방을 맡아 이석용의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다. 1918년 옥류정사가 항일사상의 본거지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함을 간파한 일제가 옥류정사 일대 1,800여평을 잠업시험장으로 조성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협박 강탈하려하자 단식으로 저항하고, 토지강제수용령이 발동되자 결사 항거하였다. 이에 일제가 집 일대에 방화하였으나 '불에 타 죽겠다'고 버티므로 당황한 일경들에 구출되었으며 그후 토지는 수용되고 말았다. 1920년 조희제(趙熙濟)가 일제의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실상을 담은 <염재야록(念齋野錄)>을 저술, 발간할 때 서문을 작성한 것을 빌미로 일경에 피체되자 6일간 단식으로 항거하였다. 1942년 일제의 소위 동화정책으로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반대하고 조상의 성씨를 수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