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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김영호 선생 구국운동 추념비 여기 나라를 구하고 겨레를 사랑하는데 충성을 다하신 애국지사 김영호선생의 거룩한 정신과 발자취를 새겨 길이 민족의 사표로 기리고자 한다. 선생은 구한말인 1894년 6월3일 전주부 지금의 동완산동에서 경주 김씨 응충공 후손인 제창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제길에게 입계하였다. 10대의 소년시절에 경술국치를 맞아 통분을 느낀 선생은 어떠한 고난에서도 국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결심으로 20대 중반인 기미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앞장섰다. 이때 선생은 천도교 전주 교구장인 한영태와 민영진 조성덕 김성문등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문 2천여장을 전주부중 요소요소에 뿌리는 한편 이 지역 만세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3.1독립만세에 뜻을 이루지 못한 선생은 같은해 8월 서울에서 이충모 김형준 양재명등 동지들과 더불어 한국민회를 조직하여 본부를 서울에 두고 12월 17일 고종황제 1주기를 기하여 조선독립은 호소하는 내용의 "입궁사"란 전단 천장을 비밀리에 등사하여 서울 거리에 뿌리고 만세의 함성을 다시 한번 터뜨리게 하였다. 이듬해 전주 다가산에서 이창수등 여러 동지들과 더불어 국민회 전주지부를 설치하고 재무부장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국민회의 주최로 3.1독립만세 1주년 축하경고문 약 2만장을 작성하여 경향 각지에 살포할 떼에 전주지방을 담당하여 성과를 거두었고 그해 8월에는 서울 송영섭 박기영 동지로 부터 상해임시정부에서 탁송한 애국금 모금의 군령통지서를 받은 즉시 재무부장으로서 모금운동을 벌려 같은 해 10월 22일 서울에 있는 중국 요리점인 중화원에서 850원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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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선생은 왜경에 체포되어 미결수로 전주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른끝에 1년 8개월의 형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출옥하여 바로 만주 북안성 태안으로 망명한 선생은 현지 교민회의 간부가 되고 또 선생 자신이 조직한 조선인회 회장이 되어 상해임시정부와 제휴하면서 항일운동을 계속 하였다. 또한 선생은 농장을 개간하여 동포들에게 살 기를을 열어주는 한편 특히 동포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세우고 손수 가르쳤다. 20년에 이르는 망명생활끝에 1943년 2월 18일 만주 북안성 태인에서 농장 경영중 눈을 감으시니 향년 49세라 오호라 선생은 조국광복을 2년 남짓 남겨놓고 서거하여 한인회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조국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봄 전라북도 천도교에서 독립운동가에게 주는 메달이 전달되었으며 1977년에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선생의 공훈읅 표창하는 대통령포상을 받았다. 이에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1988년 12월 일 선생의 유족과 뜻있는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이 돌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