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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권은 군산 영명학교(永明學校) 고등과 2학년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1928년 1월 28일부터 1929년 1월 25일까지 부안군 동진면(動津面)사무소에서 면서기로 근무하였다. 1928년 5월경부터 최옥환(崔玉煥), 최순환(崔順煥) 등과 함께 신사상 연구를 시작하고 1931년 음력 10월경부터 전북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堂上里)에서 모여 회의한 결과 1927년부터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전해져 오는 위친계(爲親契)를 바탕으로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조합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1932년 2월말 명칭을 당상리저축조합(貯蓄組合)으로 하고, 최상기(崔相基) 등 위친계원 31명의 찬성을 얻어 조합을 출범시켰다. 이후 농민의 권익보호와 신사회 건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박병권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9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