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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 선봉장 김낙선의사 추모 기적의 글 지금부터 100년 전 대한제국 융희(순종황제) 3년(서기 1909년)에 즈음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견위수명의 기치를 내걸고 김의사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의병 선봉장이 되어 구국운동에 나가셨다. 김의사의 본명은 낙진이고 자는 낙선, 호는 기원이다. 조선개국 490년(서기 1881년) 9월 1일 부안군 상서면 가오리 우덕마을에서 한학자이신 아버지 김기홍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셨으며 본관은 부령(부안)이고 시조는 신라 56대 경순대왕의 큰아들 마의태자공이시며 중시조는 고려명현 문정공 김구이시다. 의사는 광산김씨와 혼인, 상서면 감교리에 분가하여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시던 중 을사늑약후 국권침탈을 노골화하는 일본군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기위해 분연히 일어선 이용서 의병장의 휘하에서 선봉장이 되시어 동지 30여명과 더불어 총15정 칼 1자루등 무기를 휴대하고 1909년 3월 8일 태인군 남촌면 일대에서 일본군기병대와 교전중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탈출, 구가하시어 치료하시다가 같은해 7월 상처가 완치되지 않은 상태로 동지 12명을 재규합 선봉장이 되시어 총 8정 칼1자루등 무기를 휴대하고 부안, 고부, 정읍, 태인, 김제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다가 같은 해 8월 8일 김제군 홍산면 내리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 중 총상을 입고 체포되어 구금되셨다. 같은 해 11월 광주지방 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투옥 된 후, 1916년 총상과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출옥하셨으나 1925년 4월 25일 젊은 아내와 어린 딸, 돌 지난 아들하나를 뒤로하고 45세의 젊은 나이로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아! 김낙선의사 거병 100년! 의사의 구국운동이 헛되지 않아 서거 20년뒤 조국은 광복의 기쁨을 얻게되었다. 그러나 나라는 아직도 분단된 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하지 아니하랴! 만시지탄의 느낌이 있으나 다행히도 광복 60여년이 지난 오늘에 조국광복염원의 꿈을 키웠던 고향땅에 그의 애국충정의 얼을 새긴 기적비를 세우게 된 것을 뜻 깊게 생각하면서 의사께서 살아오신 행적을 여기에 간략하게 글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