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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 부안 동학농민군 순국 터, 부안읍성 남문 밖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조선 시대 공개 처형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서 집행하였다. 중한죄를 지으면 엄한 처벌을 받는다는 본보기를 보여주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처형하는 것[不待時斬]'과 먼저 처형한 뒤에 보고한다는 선참후계(先斬後啓)를 적용하였다. 따라서 부안에서의 공개 처형은 부안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장소, 즉 부안읍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취원루(聚遠樓) 또는 후선루(候仙樓)라 부르는 남문 밖이었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안의 첫 번째 희생자는 노대규(盧大圭)와 노입문(盧入文)으로, 1894년 12월 29일(음력) 정부군의 총살로 순국하였다. 이듬해(1895) 1월 12일에는 주산면 홍해 마을의 박문표(朴文表), 도산 마을의 김봉보(金奉甫), 그리고 송성구(宋成九)가 남문 밖에서 순국하였다. 한 달 뒤 2월 12일에는 남문 밖에서 9명이 순국하였고, 열흘 뒤 22일에는 7명이 순국하였는데, 장소는 무론 이름마저 알 수 없다. '호남의 대괴(大魁)'로 불리던 김석윤(金錫允.김영조)이 순국한 것은 3월 18일이지만 장소는 알 수가 없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뒤 순국한 부안 사람으로 확인된 숫자는 22명이지만, 이름이나마 확인된 인물은 6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16명은 신원조차 알 수 없다. 12명의 순국 장소는 남문 밖으로 전하지만, 이외는 장소마저 알 수 없다. 이와 함께 부안 읍성의 동문 밖에서도 처형이 자행되았으며, 전남 나주로 끌려간 30여 명이 그곳에서 순국하였다는 말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