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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후, 전북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 산104-1 광복군 고평장군의 묘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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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서울 보광중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경성관립법관양성소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였다. 그 뒤 1905년 4월에는 경성지방법원 춘천지청 검사에 임명되었다. 한편 불교에 심취, 1906∼1910년간에는 전북 부안 내소사에 유거하면서 불교철학을 공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1911년 7월 대종교에 입교한 후 남도·동도본사 등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그뒤 1919년 2월 18일에는 중국 길림성 연길현 국자가 하장리의 박동원 집에서 구춘선·김영학·유예균 등 33인과 함께 광복단을 조직하고 비밀회의를 열었다. 그리하여 간도지방의 모든 교회와 단체는 독립선언서가 발표 되는대로 독립만세를 절규하기로 결의함으로써 같은 해 용정에서 3·13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어 같은 해 4월, 간도에서 조직된 조선독립기성총회장의 지시에 따라 고덕승·이상호·지 송 등과 함께 인근지역 사방으로 파견되어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해 일경에게 피체된 결원을 보충하기 위하여 활동하다가 노령에서 개최된 신국민대회에서 서일·구춘선·서왈보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이시기에 또 연길현 명월구에 의군부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가하여, 본부 총재에 이범윤, 총사령에 김현규, 참모장에 진학신 등으로 배치될 때 중부 의군부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실제 중심세력으로 5개 대대를 보유하였다. 1920년 8월 하순에는 중국 토군이 일제에게 매수당해 내습한다는 정보에 접하여 150명으로 감사대를 조직, 노야령에서 전투를 벌여 중국 토군을 격퇴하고 일군에게는 대타격을 가하였다. 그 뒤, 청산리대첩을 거두고 난 다음 밀산을 경유, 노령으로 들어가는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러시아로 들어갔으나,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이 일어나자 원래의 활동 근거지인 연길로 되돌아와 의군부 재기를 위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 1월에는 연길현 춘양향 합마당에 위치한 대한국민회 군정사군무서 독판 서일 휘하에서 김덕현·손범철 등과 함께 군정회의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어 1923년 5월에는 연길현 명월구에서 고려혁명군을 조직하고 총사령에 김규식을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에 피임되어 병력이 4백여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군사훈련과 조직을 강화하고 국민개병제로 병농일치의 둔전제를 택하는 한편, 노령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해오는 등 군세를 확충하였으나 실제 항전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뒤 1928년 재만동지회를 조직하여 이주 한인의 생활정착에 힘쓰다가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