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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단 사적기(誓報壇 事績記) 서기 1895년 을미(乙未) 8월 명성황후(明成皇后)가 폭악무도한 왜적(倭賊)들에 의하여 시해(弑害)되니 2천만 국민이 슬픔과 울분(鬱憤)은 하늘에 사무치고 일본에 대한 복수(復讐)의 소리가 삼천리 방방곡곡(坊坊曲曲)에서 터져 나왔다. 그후 곳곳에서 그 추모사업(追慕事業)이 이루어졌으니 1903년 계묘(癸卯) 3월에는 서울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 감모비(感慕碑)를 세우기로하고 유사(有司)를 정하여 각 도(道)에 헌금통문(獻金通文)을 보냈다. 이때 호남(湖南)에는 전주사(前主事) 한승이(韓承履)가 태인(泰仁) 무성서원(武城書院)으로 내려와 통문(通文)을 전하니 이를 각 군(郡)의 향교(鄕校)에 통지하여 1903년 7월 15일 이곳 내장사(內藏寺)에서 대회를 가졌다. 대회에는 경유사(京有司) 한승이(韓承履) 내장사승 서담(內藏寺僧 西潭)과 26개 군(郡)에서 54명이 참가했는데, 헌금(獻金)을 배정한 후 유공하상(柳公夏相)의 발의(發意)로 서보단(誓報壇)을 쌓고 북쪽을 향하여 곡배(哭拜)하는 가운데 복수를 맹세하였으며 매년 8월 20일 추모제(追慕祭)를 거행(擧行)키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