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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당산나무 화호리의 중요한 민족문화 중 하나는 당산재이다. 한일합병 이전까지만 해도 마을 내 가장 큰 행사였으나 일제에 의해 맥이 끊어졌다 다시 부활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화호리의 당산할머니는 기가 세고 성질이 사납다고 믿어 당산제를 지내기 전 마을에 금줄을 치고 어린 아이들이나 임신한 부녀자들을 되도록 못 오게 한다. 비록 소멸위기에 처해있으나 화호리 당산제는 한때 마을공동체를 화합시키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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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⑫ 일본인 농장직원 사택 구마모토 리헤이는 다른 일본인 지주들과 달리 조선에 거주했던 것이 아니라 한 번씩 시찰 목적으로 이곳을 다녀갔다. 그가 화호리에 머무르지 않고도 대규모 농장을 관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 직원인 경리과장과 농산과장 덕이었다. 구마모토는 화호리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집을 지었고, 자신의 가옥 대문 양 옆으로 경리과장과 농산과장의 사택을 마련했다. 두 일본인 관리의 집은 구마모토 가옥 다음으로 규모가 컸다. 이들 건축물은 건축물대장에 사용승인일이 1934년과 1936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그 이전에 신축된 건축물로 판단된다. 광복 이후 마을사람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구조가 상당히 변경되었으나 곳곳에 일식 주택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 두 주택 외에도 일본인 직원 합숙소, 일본인 직원 사택 등 구마모토 농장 직원들이 생활하였던 건물이 화호리 곳곳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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㉕㉖ 고바야시 상점과 대장간, 장제소 일제강점기 화호리 마을 중심부에는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고바야시(小林)상점, 대장간, 장제소 등이 들어섰다. 상점에서는 일본인들이 필요로 하는 식료품과 생필품을 취급하였고, 대장간에서는 농기구를 제작했다. 장제소는 말의 편자를 바꿔주는 곳으로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화호리에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곳이 얼마나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현재 이곳은 일반 주택으로 변형되어 마을주민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