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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창 김창동은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점된 뒤로 망국의 한을 품어오던 중, 1915년 일제의 상사금(賞賜金)을 질척(叱斥: 꾸짖으며 물리침)했고, 또 큰 아들을 일본인의 학교에 입학시키라는 강요를 단호히 뿌리쳤다. 1925년에 동문인 오진영(吳震泳)이 스승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할 때, 여러 동문의 선봉이 되어 그의 선생의 뜻을 저버린 죄를 성토하였다. 이 때문에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여러 번 호출을 당했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였다. 광복 후 전우의 문집 수정본을 발간하였다. 1930년경 단발령과 창씨개명령(創氏改名令)에 불응해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으며, 일제가 주는 배급은 받지 않고 솔잎과 감자로 연명하였다. 항상 복수설욕의 일념으로 왜적을 타도할 기회를 엿본다는 뜻으로 불망실(不忘室)을 건립해 일생의 고절(高節)을 수립하고, 후학의 교육에 힘썼다. 그는 도학과 문장이 전우의 수재로서 일시의 사표로 칭송되었다. 1964년에 문인과 유림들이 공의 도덕을 기념하기 위해 출생지인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에 창동서원(滄東書院)을 건립해 향사하였는데, 이 서원은 1975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부안 계양사(繼陽祠)에도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후창집(後滄集)』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