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page


450page

독립운동가 박준승.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임실출신이며, 천도교인다. 1891(고종 29)에 천도교에 입교하여 1987년(광무 1)에 접주가 되고, 1908년(융희 2)에 수접수, 1912년에 전남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장 겸 전라도 순유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경에 손병희로부터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고, 수교도 유태흥, 박영창, 김의규에게 독립선언서 5천 매를 배부받아 장성.임실등지에서 궐기하였다. 그는 2월 25일부터 27일경까지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했다가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과 만나 3.1독립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승낙하였다. 2월 27일 최친, 오세창, 임예환, 권병덕, 나인협, 홍기조, 김완규, 나용화, 홍병기, 양한묵등의 동지들과 함께 김상규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하였다. 28일에는 재동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틀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 검토를 하였다. 그는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에 손병희등과 함께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산외면 정량리 인계마을에서 별세하여 처도교회당에서 교회장으로 거행하였고, 북면 마정리 칠보산에 안장되었다가 1963년 현 위치인 정읍시 수성동 충무공원으로 이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