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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6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자유활동을 하면서 노동관계서적을 탐독하여 정치 식견을 넓혔다. 그해 9월 동경대지진으로 말미암아 중국 북경으로 돌아왔다. 1928년 9월 중국 남경에서 열린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창립대회에 조선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였고 기관지 동방의 편집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1930년 10월에는 북만주로 들어가서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11월에는 일제의 대륙 침략이 점점 도를 더해가자 의사는 오면직 이강훈 원심창 이달 김기강 류기문 진수방 중국인 전화민 일본인 재야 일랑 등과 흑색공포단이라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천진으로 가서 일본 수송선을 폭파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33년 3월 17일 일제 대륙침략의 원흉들을 당시 주중공사 일본 유길명이 외교적 침략으로 중국의 정계요인과 일본군벌들을 상해공동조계문로에 있던 일본요정 육삼정으로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다는 사실을 탐지하고 이강훈 정화암 오세민 일본인 야타베(矢田部) 등과 그들을 폭살하려는 계획을 추진 중 이날 현장에서 피체되었다. 기후 일본장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일본 장기형무소에서 복역 중 1934년 갑술 음 4월 24일 양 6월 5일 옥중에서 서거하니 향년 39였다. 광복 후 1946년 7월 6일 유해를 일본 장기에서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옮겨 국민장으로 안장되었다. 의열사는 1996년 10월 2일 사단법인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다음해 의사 고택 근지인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928번지 주변토지 5939평의 터를 닦아 1997년 10월 31일 기공하였다. 무려 7년 여에 걸쳐 국비 12억원 도비 13억 5천만원 시비 18억 5천만원 보조로 사당 강당 기념관 등을 완공함에 기 규모가 자못 괄목하고 남음이 있으니 이는 의사의 열렬한 애국정신을 추모함이요 나아가서 민족애의 표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