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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 건립사기 한민족의 굴욕은 죽음보다 오히려 참기 어려우며 자유는 생명보다도 차라리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1919년 독립을 선언한 3.1운동은 민족사 내지 세계사에 길이 끼친 불명의 녹음이다. 33인의 서명으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됨과 함께 일제에 대한 전국적인 민족항쟁이 일어났던 한편 유림대표 곽종석, 김복한 등 137인의 서명으로 일제 침략을 폭로하고 독립을 호소하는 글을 지어 김창숙이 상해로 가져가 다시 김규식으로 하여금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평화회의에 제출하여 국제의 여론을 환기시킨 일이 있었던 것이야 말로 3.1운동사와 쌍벽을 이룬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함은 본시 유교의 본○이요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함은 그 또한 유교인의 신조이다. 역대의 의병운동에 항상 유학자들이 선봉에 섰고 특히 1895년 이래 구국운동에 피를 흘렸으며 이때에 운동이 진실 그 정신 그 신조의 발로이다.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선열들이 혹은 투옥 혹은 망명 그리고 또는 순국함으로써 천지와 더불어 우뚝한 민족정기를 한껏 발로하고 마침내 조국 광복을 성취하여 국맥을 되살렸으니 우리 어찌 그 어른들의 업적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 137인 지사들은 유기적인 연결이 되지 못하여 3.1선언문의 서명에 불참되었다 하나 이 파리장서운동은 우리의 민족운동사에 있어서 음으로 양으로 이바지한 그 불멸의 위훈이 실로 지대했던 것이었다. 그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금도 중부 영남 호서지방에서는 기념비가 건립되어 세인의 이목을 새롭게하고 있으며 호남지방의 파리장서 서명인, 10인의 선열들 명단이 있으나 아직껏 비 하나 건립되지 않았으니 이는 지방민의 조기치 못함이 아니겠는가. 회상컨데 충절의 고장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 두암마을에서 서기 1849년 11월 11일 출생하신 유제 김양수 선생은 2001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을 추서받고 고향에 건립된 두암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서원조정에 김선생 추모비가 건립되어있다. 이에 본 시에서는 국비와 도비를 지원받고 시비를 출연하여 파리장서기념비를 건립하여 대의의 정신과 구국이념을 자손만대에 전하여 영원한 번영을 기원한다. 단기 4342년 2월 일 정읍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