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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김개남장군 피체지 이곳은 1894년 12월 1일(양력 12월 27일) 동학 주요 지도자중의 한 분인 김개남장군이 관군에게 붙잡힌 장소이다. 김개남의 본관은 도강, 어려서 이름은 영주, 자는 기선, 기범으로 1853년 태인(현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에서 태어났다. 1890년경 동학에 입도하였고, 1892~93년 조교신원운동기에 적극 참여해 지도력을 발휘하며 태인의 대접주가 되었다. 뒷날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지도자로 활약한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현실비판과 사회개혁에 뜻을 같이 하였다. 1894년 1월 10일 고부봉기이후 보국안민과 척왜양의 기치를 대내외에 널리 알린 백산대회때 동학농민군 총관령이 되었고, 남원을 중심으로 전라좌도의 도학농민군을 이끌며 폐정개혁을 관할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때에는 금산과 청주를 거쳐 서울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11월 13일 새벽 청주를 공격하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배하였다. 이후 태인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 관군에게 체포당하였다. 전라감가 이도재는 그를 전주로 압송한뒤 서울로 이송하지않고 1894년 12월 3일(12월 29일)전주 서교장에서 참수하고 수급(首級 서울로 보냈는데, 서소문 밖에서 3일간 효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