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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애국지사 진치만 공적비. 월정 진치만 1876~1925년 선생 조선말기 한반도가 세계열강의 각축장이 된 국난극복 시대상황(정신)에 맞서 수학의 길을 정진하시다 '충효 없이는 학문도 종교도 없다'는 뜨거운 가슴과 선구자의 용기를 발휘하여 19세 나이로 창의에 가담. 청일전쟁을 승리한 일본이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단발령 등 주권국가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의분 스승이신 기삼연 기우만 호남우도 의병대장(전남) 대열과 함께 하고 고종황제의 의병해산령으로 향리에서 외세에 대항할 민족의식 고취와 제자를 양성하다. 1905년 러일전쟁 승리후 일본의 을사보호조약에 면암 최익현 돈헌 민병찬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 의병장(전북) 대의를 따라 국권회복운동 독립의군부 활동을 하였고 1910년 일한합방에 군산(옥구)출신 전오풍 문형모 애국지사와 동지규합및 군자금 마련에 나서 봉기할 기회를 도모하던중 1913년 여양전씨 시조(관향) 현 홍성에서 춘당 이용규 의병대장(충남) 등 전국의 8인 유림대표와 진충보국을 결의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에게 국권반환요구 서신을 보내고 일본군을 상대로 홍성 예산지역 전투에 참여하는 지속적인 활약을 하였으며 1916년 광무황제 유명서를 제작 일본군국주의 침략이 부당함을 국내외에 알리고 마패를 이용 독립운동세력 확장에 나섰으나 1917년 5월 일경이 정황을 탐지 홍성경찰서에 피체되어 선생은 평안북도 신미도에 1년간 유배, 귀향 한 후 1918년 김태영, 곽한일의병장과 항일애국동지를 재규합하다 일경에 체포 1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1919 3.1독립만에운동에 정읍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도중 발각되어 실패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상해임시정부에 참여코다 마지막 애국혼의 불꽃을 지피워 병약해진 심신으로 꿈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민족자존을 지켜 시련과 역경속의 일생을 일제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조국독립을 위한 한의 염원을 간직한채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4년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고 1997년 묘소는 입암산 선영에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영면) 1999년 공적비를 세워 민족정신문화의 소중함과 치열한 삶 시대상황(정신)에 맞서 지혜와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희망의 빛을 찾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