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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는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종로에 정착하였다. 1918년경 일본 동경에 유학 중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발표와 제1차 세계대전 종결로 인한 약소국의 독립분위기에 따라 동지 백관수(김도연 등 7명과 같이 적지에서라도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자고 비밀회합을 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하여 일본 동경에서 한국인으로 유학하는 남녀학생 청년 등을 규합하고 독립선언문을 낭독, 대대적인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1919년 2월 8일 적지에서 2 8독립선언을 실현케 하였다. 즉 그는 2 8독립선언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재정책임의 사업을 분담하였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귀국, 송진우김성수 최린 등 독립지사를 차례로 방문하고 협조를 당부하였다. 이 같은 학생들의 독립운동 계획에 자극되어 이들은 그들대로 3 1운동을 중앙중학교 중심으로 계획하게 된 것이다. 그는 2 8독립선언이 있은 뒤 주모자가 체포되고 막후 연루자도 미행을 당하는 등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그해 4월경 상해로 망명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고 법제위원과 정부조사 특별위원 및 정치분과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입법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 추진하였다. 1922년 1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이동휘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동년 5월 10일에는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에 선임되어 국민의 대결속과 독립운동을 위한 대동단결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의원, 보사부장관,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