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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김양수선생 추모비. 애국지사 김양수선생은 1849년 11월 11일(음) 전북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 두암마을에서 부친석귀의 아들로 태어나 학문에 조예가 깊어 사서오경을 통달하며 역학에 득력한 이름난 유학자로서 유재는 선생의 호이다. 시운이 부색하여 광무9년 10월 19일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6년 윤4월 13일 면암최익현선생이 청읍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킴에 선생은 유생 고석진, 고제만, 고례진, 고성열, 고시덕, 배화옥, 최태근, 강익문등 80여명과 함께 서중의려를 규합하면서 고례진과 토왜격문을 팔도에 전포하였으나 동년 4월 26일 순창전투에서 의병대장 면암선생과 12의사가 피체되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의분을 참을 길 없어 계속 항일구국운동에 매진하였다. 1914년 7월에 광무황제로부터 독립군 의군부 참모관의 밀칙을 받고 경상, 충청, 전라도에 일원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면서 정읍 고창, 부안, 순창등지에서 활약 무기와 군자금을 모취하여 독립군 전라남도 재무국장 강익문에게 전달하였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가담 왜경에 피체되어 고초당하기도 했으며 동년 5월 불국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됨에 선생은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전국유림대표 곽종석, 김복한 등 137인과 함께 원문 2,674자를 작성 독립청원을 호소하고자 심산 김창숙선생으로 하여금 중국상해에서 자주독립탄원을 연서밀송하다가 일노에게 발각되어 전원 가진 고문과 옥고를 당하였으니 바로 역사적 파리장서사건이라 그를 기념하여 오늘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가 서울 장충단공원에 건립되어 있다. 선생은 왜경의 감시하에 계속 부복부적부세하고 오직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다가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채 이곳 자택에서 1930년 8월 7일 82세 일기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 8월 15일 건국포장을 추서하니 정읍의 인물로 시청사 현관에 사진을 공개하고 추모비를 건립하였으며 정읍시사에도 기록하여 유지를 기리며 우리에게 내일에 애국우국을 위한 교육사료가 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