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page


165page

년 6월 직접 행동을 주장하는 정열의 선생은 당시 사회를 풍미하든 소련 괴뢰 독재적 공산당을 배격하고 독립운동의 이론과 방법에 있어서 완전히 무정부주의에 공명하여 마츰내 재중조선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고 이회영 정화암 이을규 이정규 등 동지와 주간지 정의공보를 발간하였다. 동년 11월 선생은 다시 노동운동을 전개코저 상해 영인 경영의 철공장 직공이 되여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일방 중국 동지 노검파 및 대만 동지 범본량 등의 화남 아나키스트 연맹과 제휴하여 노동자의 사상계몽에 진췌하였다. 그리고 또 중국 동지 육불여모일파 등이 주재하던 상해 공단 연합회를 적극 강화하던 차에 4258년 5월 주일 영일 양국 자본가를 상대로 저 유명한 오주 상해 총파업이 이러나자 12만 노동자를 동원하여 갖이고 이에 가담하여 중구적인 투쟁을 하였다. 4261년 9월 남경에서 한중일비안인 등 제국 동지들로써 동방 무정부주의자연맹이 조직되자 선생은 한국대표로 출석하였으며 동 연맹기관지 동방편집위원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4263년 10월 당시 북만주 해림 지구를 기반으로 김좌진 이을규를 비롯하여 해방 전 대일 대공 투쟁에서 순절한 김시야 김야운 이준근 엄형순 김야봉 등 동지가 한족연합회를 조직하고 한교의 조직화와 혁명사상 고취에 전력하던 중 우리 독립운동을 분열 저해시키기에 혈안이 된 공산도당에게 백야 김좌진 동지가 피살되자 그 복수운동이 이러나 선생은 정화암 김지강 양여주 등과 급히 해림시로 달리여 그곳 동지들과 합세하여 공산도당 숙청과 일제 주범 박멸에 쇄신 혈투하였다. 4264년 9월 만주사변이 촉발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