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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松沙)라는 호는 기우만이 처음 살았던 황룡면 하사촌과 나중에 옮겨 살았던 진원면 월송리의 가운데 두 글자를 따서 쓴 것이다. 송사는 장성향교를 거점으로 위정척사의 대의와 구국충절의 의병을 모집하여 이학상을 선봉장으로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 등이 참여하는 의병단을 조직하여 ‘호남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송사는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모든 의병을 2월 30일 광주로 모이게 하니 그 세력이 막강하였다. 고종은 학부대신 신기선을 선유사로 보내 “의병을 일으키는 일은 왕권을 약화시켜 외세의 개입을 더욱 가속화 할 것”이라며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였고, 송사는 유생들과의 논의 끝에 해산을 선언하고 말았다. 이로써 의병활동은 잠시 소강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송사는 이 때 “국왕이 굴욕을 당하고 황후가 시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도 원수를 갚지 못한 채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며 고향 뒷산인 삼성산에 삼산재라 이름을 붙인 초막을 짓고 은둔해 있었다. ..... 출처 : 장성군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