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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협, 교훈관 한자선이었다. 그리고 양공자신은 도총독으로서 특별히 선발된 120명의 용사들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1909년 12월 3일 공이 김제군 월출면 봉월리부근에서 일본수비대에게 체포되기까지 약 1년반동안 공과 예하부대들은 순창, 남원, 임실내 각처에 산재하는 일본의 수비대를 습격 수십차의 전투를 벌려 많은 전과를 올렸으니 그 내용은 재판기록과 일경의 비밀문서에 상세하다. 생각컨대 양공의 항쟁한 시기는 일제의 침략술책과 일부 매국적의 내응으로 500년 사직이 일조에 무너져 가는 때였다. 다행히도 양공과 같은 숭유술중명절의 500년 전통을 이어받은 이 나라의 만은 유생들이 전국 각처및 해외에서 분기하였으나 이미 기울은 국은은 그들의 입절사의로도 어찌할수가 없었다. 나라는 곧 망하고 민족은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양공을 포함한 저들 순국선열들은 죽어서도 결코 흙이 되지않았으며 영생불후의 웅걸지혼로서 조국의 독립을 명명지중에 도와 끝내는 을유의 광복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오늘 번영조국에 생을 누리는 후생들로서는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잊을수있겠는가? 다만 양공의 경우는 불행히도 그 사적마저 오랫동안 묻혀서 세상에 아는이가 극히 적었던바 수년전에 당시의 남원양씨 대종회 양상곤회장과 종인 양만정교장의 각별한 노력으로 그 일부가 밝혀지고 1980년 8월에는 정부로 부터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받는데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비를 세우게 되었으니 여기에는 보훈처와 순창군수의 발의와 협조, 양병창대종회장과 양교장의 추진 그리고 역사일공을 담당했고나선 고인의 윤자 병관의 성의가 모두 합쳐저 힘이되었다. 양공의 휘는 춘영 또는인영이요 자는 윤숙이며 훈계는 호이다. 공은 고려말 순창 귀미에 입거한 이래 이 지방 명문의 하나로 칭을 받았던 남원양씨의 일원으로 쌍매당 휘 사민 의11대손이며 진사공 휘 시익의 10대손이다.1875년 12월 2일에 순창군 구림면 국화촌에서 고절형장군 용? 휘 부호군검 중추 휘 석민과 비 해주오씨의 장자로 태어난 공은 어려서 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재예가 총?하여 일찌기 경서와 제자서를 섭렵하였고무예의 수련에도 힘썼으며 한때에는 팔장하여 참봉과 주사직을 지낸일도 있다. 배위는 도강 김씨 장흠의 녀로 1967에 94세로 졸하였는바 무사하여 제 택영의 자 병관을 속자로 삼았고 묘는 공묘에 부하였다. 병관은 부안김씨를 취하여 록 만주, 만국, 만성등 4만과 2녀를 두었으니 장녀 여경은 정?현에게 차녀 선경은 혁승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