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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순창군 인계면 독이봉 기슭에 자리한 이 묘는 1910년 3월 9일 당시의 일제통감부치하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소에서 교수형의 선고를 받고 동년 4월 14일 광주감옥 전주분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의병장 양공께서 잠든곳이다. 당시 공의 나이는 36세 양공이 구국항일의 대열에서 처음 참여하는것은 1906년 6월 면암 최익현이 태인에서 돈헌 임병찬과 더불어 의거하였을때 그 막하에 들어가면서부터이다. 돈헌의 창의일기에 공의 활약상이 나타나있다. 그러니 공이 본격적으로 항일의려를 일으키는것은 1908년 음 7월부터이니 이는 위 최면암, 임돈헌의 부대가 태인거사 10여일만에 순창에서 무진지 약 2년후의 일이었다. 송의 재판기록에 의하면 공은 이해 음7월2일에 몇몇 동지들과 더불어 항일투쟁을 결의하고 회문산에 본부를 설치하여 한편으로는 격문과 통장을 호남의 각향교및 그 밖의 여러곳에 발송하여 창의를 호소하고 또 한편으로는 모여든 의병을 편성훈련하였다. 위 기록에 나타난 당시의 군세를 보면 병수가 1,200명에 총이 270정, 칼이 300자루였으며 부서에 있어서는 좌선봉에 최화, 우선봉에 임순호, 중군 최산흥, 훈군 이국찬, 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