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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 의병장 묘소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과 함께 병오창의(丙午昌義)를 하여 회문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하였던 임병찬 의병장의 묘소이다. 임병찬 선생의 본관은 평택, 호는 돈헌으로 전라북도 옥구 출신이다. 조선 철종 2년인 1851년 음력 2월 5일 임용래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학을 배웠으며, 39살에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1906년 2월 최익현과 더불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군사모집과 훈련, 군량비 조달 등의 책임을 맡아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을 점령하고 관곡을 취해 군량을 확보하여 진용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6월에 순창객사에서 최익현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감금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월 황태자 가례 기념으로 풀려나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재차 거사를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에 따라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이듬해에는 독립의군부의 노선, 조직, 활동 등을 구상하여 정리한 '관건'을 작성하여 고종의 재가를 받았다. 그 후 1914년 2월에는 이명상, 이인순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 의군부의 편제로 재조직하였다. 선생은 총사령이 되어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 강제 병합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의 통치에 한국민이 불복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한편 국민 대중에게 국권 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제를 축출하려는 항일의병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1914년 5월 일제 경찰에 의해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이하 관련자들이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대거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체포된 후 옥중에서 3차례의 자결 시도와 단식으로 투쟁을 하다가 1914년 6월 거문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한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1916년 음력 5월 23일 거문도 유배지에서 66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면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사하였다. 선생의 묘소는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직계 친손들이 순창군의 협조를 받아 전면 부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