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page


15page

전국의 경찰서를 일시에 폭파하려다 발각되여 끝내는 상해로 망명하셨다. 그 뒤 만주 관구현 대빈강에서 한약방을 하면서 최전구, 이래수, 백정기의사등과 함께 대한유림독립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추대되여 독립전역을 지위하는 한편 대종교에 입교하여 설교원 참교가 되어 동포들에게 단군사상을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그 뒤 서울에 잠입하여 독립의군부를 조직 맹약중에 일헌에 발각 재차 망명길에 오른뒤 노령 신한촌 고평장군의 막하에서 독립군 중장으로 추대되여 수천차에 걸쳐 일군에 치명타를 가하셨다. 3.1운동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간도에서 신흥부관학교 교수로 병략을 강의하던중 상해로 가 임시정부통신책임자로 활약하셨다. 그 뒤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조달중 왜경에 피체 서대문형무소와 춘천형무소에서 5년간 복역후 다시 북만주에 망명, 황병길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또 다시 피체되어 전주와 서대문 형무소에서 3년간 재복역 몇번의 구유등 미결까지 아울러 전후 10유년의 모진 옥고를 치루셨다. 출옥후 지리산에 피신하셨다가 815광복을 만나 귀가 3.1동지회를 조직 건국에 힘쓰는 한편 김구선생과 함께 남북통일정부수립에 전력하셨다. 주석의 피격후에는 고향에서 실의에 감겨 지나시다.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신음끝에 1955년 10월 7일 65세로 별세하셨다. 자진시름 어리인 먹구름도 이제 차츰 걷혀가는 조국의 사당 안뜨락에 버텨서서 푸른잎새로 겨레를 감싸는 교목이시여 기우는 대우를 지탱하는 돌기둥중의 지주시여 국경선에 어리이던 그 교악같이 미덥던 모습이여 지리산 산새들도 눈물짓던 사연들 가고 이제 되찾은 고향 섬진강 굽이치는 중류 앙룡골산 무량산의 정기를 한몸에 이어받은 의사는 면민일동은 물론 순창군민 전체가 오직 독립정신을 이어받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정신을 길이 길이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추모비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