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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지한인 경술국치를 당하자 공은 일제에 유린 강점당한 통한을 억지치 못하고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산주촌 전경언과 사제 영하와 마령면 평지리 오기열 김구영 황해영 등 인과 결의 맹세하고 항일독립을 위한 국민봉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강호에 ?포하시며 기운을 관망하시다가 마침내 서기 1919년 3월 초 1일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동지들과 궐기를 호소하며 태극기와 대한독립선언문을 입수 평지리에서 은밀히 이를 제작하시어 군내 각동리에 배포 첩부케 하여 진안군민의 의거를 주도하시었다. 동월 6일 조선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천지에 진동하고 마이령봉에 메아리치자 광분한 왜경들은 장검을 휘두르며 저지하려거늘 공께서는 왜경을 붙들고 여 등도 만세동참하라 질타하시면서 과감히 선두에서 행진하시었거늘 끝내 왜경에게 피체되시었다. 연행도상에도 대한독립만세를 절규 부절하며 항거하시었고 사제 영하공 역시 사생결단하고 왜경에 돌진하여 종횡무진 격투를 벌리면서 퇴로를 타개하려 하시었으나 중과부적으로 체포당하신바 되었다. 공께서는 동년 4월 2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고 불복 상고 동년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형사 제2부에서 역시 징역 1년 6월이 선고되어 영어의 몸이 되어 박해와 고초를 몸소 당하시었으나 공의 애국충성은 일익공고함이 더할뿐이었다. 출옥지후에는 일제강점의 강압은 날로 치열하고 친일주구는 강산에 창궐함을 목도하기에 이르자 세태의 무상함을 탄식하시며 1시 마령면 덕천리 판치막동 산중에 초려를 결하고 은둔자적 하시었으나 점차 극성하는 일제의 억압과 수탈정치에 울분을 참지 못하시고 드디어 서기 1929년 10월 단신 압록강을 건너 만주땅에 잠행하시어 독립운동가들과 합류 활약하시다가 자금조달이 화급한 문제임을 절감하시고 서기 1942년 7월 은밀히 귀향 동분서주 하시었으나 태평양 침략전쟁에 광분하는 일제의 혹독한 민족말살정책과 극심한 강압하에 추격을 피하여 백운동곡에 은신중 서기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공께서는 즉시 태극기를 들고 나오시어 군중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시며 평생염원이던 조국광복의 환희를 유감없이 발산하시었다. 공께서는 1958년 무술 9월 12일 향년 73세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치셨다. 공의 애국충정과 불굴의 신념은 영세불후의 충절의 정화이며 가? 후인의 귀감이 될 것임에 충분할 것이다. 서기 1983년 8월 13일 숭고한 애국정신을 발휘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운동에 헌신노력한 공으로 대통령표창장을 수령하였으며 서기 1990년 12월 26일 대한민국정부에서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서기 1992년 6월 초 1일에는 국가유공자증이 증여되었다. 오호라 공의 초야의 사인으로써도 그 독행은 능히 조신을 능가하며 그 절조는 가히 국사에 비견할지니 권열에 아유구용하고 탐욕에 파기염치하여 면유지강은 부란되고 오륜지도는 수지되어 인심은 흉황한 세태리에 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