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page


107page

해 정월에 수남 고석진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방책을 마련한 뒤 면암의 뜻을 받들어 돈헌 임병찬과 초기 의병활동 주도세력을 규합할 때 돈헌은 태인의 종석 여막을 거점으로 하고 습재는 면암을 이곳 삼우당에 모시고 주서 이호용과 장수 태수 정휴탁 임실 태수 조규하 운봉 주서 박봉양 영남 면우 곽종석 화개 강두령 등과 연락하여 뜻을 모으며 형인 약천 재태와 함께 가산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나이 25세에 소모장이 되어 순창으로 무기를 옮길 때 상여를 꾸며 일제의 눈을 피하였으니 그같은 지혜와 용기에 대하여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면암이 없으면 습재도 없고 습재가 없었더라면 면암도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녹슬은 창칼이 저들의 신예 무기를 대항할 수 있었으랴. 이때에 패전과 동시에 일광 정시해는 순국하고 왜적에게 끌려간 면암은 3년 돈헌은 2년의 형을 비롯하여 선생과 수남도. 4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옥한 선생은 대마도로 면암을 찾아 간병하다가 면암이 순국하시니 장례를 극진히 모시었다. 고향에 돌아와 고산 윤자신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회를 노려 방랑하다가 1915년 가을에 지리산 하동 청암에 들어가 은거하던 중 1959년 가을에 한 많은 일생을 마치시니 향년이 78세였다. 실로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의 쓰라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