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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배재고등학교 학생대표로 조선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33인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에 적극참여 하셨고 전국 각계각층의 지방유지와 학생대표들을 망라한 비밀조직을 통하여 독립만세운동을 확대 조선민족독립에 대한 확고한 염원을 세계만방에 널리 전달하였다. 1919년 3월 5일 숭례문 부근에서 태극기와 독립만세 깃발을 배포하여 군중들을 통솔하시 중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구금되었다. 잔악무도한 1년여 옥고를 치루시는 중에도 유관순열사를 비롯하여 당시 투옥된 애국동지들과 함께 옥중 독립만세운도을 계속하시어 독립을 향한 결심을 굽힘없이 보여주셨다. 1920년초 형무소로부터 출감 직후 독립조선의 민족발전을 위하여는 여성교육이 가장 시급한 관제라 절감, 뜻을 함께하는 애국동지들과 여학교를 설립 "근화여학교"라 명명하셨다. "근화"란 무궁화를 의미 조선민족자체를 상징한다. 1930년경 "근화"의 참뜻을 알게된 조선총독부의 강요에 의하여 학교 이름을 "덕성"이라 변경되었다. 아!아! 8.15해방을 맞은지 장장 66년. 빼았긴 민족의 얼이 담긴 "근화"를 되찾을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근화를 떠나신 후 헐벗고 빈곤한 농민을 도우시고자 양봉관리기술을 연구하셨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약5년동안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무려 50여회의 양봉관리기술에 대한 기사를 쓰시는 한편 전국각지를 순화하시며 농민을 위한 양봉강좌를 개최, 양봉현대화에 전념하셨다. 작고하시기전 수년간을 성경에 몰두하시며 의식이 희미하신 중에도 집안걱정보다는 나라걱정을 앞세우시며 애국지사들의 성함을 머리맛 벽면에 그림그리듯 낙서하듯 쓰시고 1971년 4월 25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면하셨다. 아버님! 아버님! 우리아버님 어린시절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면하실때까지 오로지 민족의 안위만을 생각하시며 남녀노소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사랑하고 아껴주시던 숭고하고 거룩하신 우리아버님 주님의 은총으로 영원히 편안하시옵소서! 2011SUS 12월 10일 유가족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