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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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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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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찰수(李刹修)는 1919년 4월 경남 밀양군(密陽郡) 단장면(丹場面) 태룡동(台龍洞)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같은 사찰 승려인 이장옥(李章玉)의 만세운동계획에 적극 찬동하였다. 이장옥은 표충사의 법무계(法務係)를 맡아 보고 있는 서기 김종석(金鍾碩)에게 등사판을 이용하여 ‘선언’이라는 제목이 붙은 격렬한 문장을 인쇄하도록 하였다. 이 문장에는 ‘조선민족 대표 손병희·김병조·한용운·백용성 외 29인의 신탁(信託)에 의해 우리들은 조선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기로 맹세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찰수는 같은 사찰 승려인 오학성(吳學成)·손영식(孫永植)·김성흡(金性恰) 등과 함께 태룡동 장터로 나갔다. 장터에는 1,5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군중 앞에 나아가 나팔을 불며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작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주민이 호응하여 장터는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그는 사전 계획에 따라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헌병주재소로 행진한 뒤 솔선하여 헌병주재소 사무실과 숙사에 돌을 던지며 격렬히 항쟁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2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으나 이에 불복하여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해 12월 10일 원 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0년 12월 17일 출옥하였다. 그는 1933년 8월 24일 오후 10시경 청도역(淸道驛) 부근에서 시국에 대한 연설을 하려다가 청도경찰서에 검속되어 3일간 구류처분을 당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