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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용(尹世茸)은 경남 밀양(密陽) 사람이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윤세복(尹世復)·이원식(李元植) 등과 함께 조국광복에 헌신할 것을 결의하고 1912년 1월에 만주 봉천성 환인현(奉天省桓仁縣)으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독립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먼저 투철한 애국사상을 가진 인재가 있어야 한다고 느끼고 환인현에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였다. 1919년에는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圭)·조병준(趙秉準)·전덕원(全德元) 등 대표자 500여명이 모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조직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였으며, 1920년 6월에는 홍 주(洪疇)와 함께 총탄운반 작업을 하였다. 1921년에는 제3 국제공산당 동양민족대회에 한교민단 대표로서 손서하(孫西夏)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한편 그는 이보다 앞서 부민단·한족회 등에 가입하여 교육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참모로서 손병헌(孫炳憲)·이장녕(李章寧)·오석영(吳錫永)·독고 욱(獨孤旭) 등과 함께 참모부장 이천민(李天民)·부감 전덕원 등을 보필하였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원으로서 현천묵(玄天默)·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임명되었으나 여러 가지 주변사정으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1926년 10월 10일에 다시 임명되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해인 1926년에는 남만지역에 위치한 참의부가 1925년에 있었던 고마령(古馬嶺)전투에서 군대 간부를 비롯한 29명의 전사자를 내어 위축되자, 1926년 봄에 참의장으로서 금 남(琴南)·이관진(李觀鎭)·이 춘(李春)·김우일(金又一)·송남형(宋南亨)·김백헌(金伯憲) 등과 함께 참의부의 체제 정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1941년 북만에서 병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