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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복(尹世復)은 경남 밀양(密陽) 사람이다. 1909년 영남 일대의 항일 동지인 안희제(安熙濟)·이원식(李元植)·김동삼(金東三) 등 80여명과 함께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0년 12월에는 대종교 교조 나 철(羅喆)을 방문하고 일제침략으로부터 조국해방과 근대적인 민족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은 대종교의 민족정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대종교에 입교한 그는 친형인 윤세용(尹世茸)과 상의하여 부유했던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1911년 2월 만주 환인현(桓仁縣)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항일을 위한 첫단계로서 동창학교(東昌學校)를 환인현에 설립하고 혁명 동지를 모아 민족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로서 2세 교육에 주력하였다. 1919년에는 여 준(呂準)·정안립(鄭安立)·박성태(朴性泰)·박찬익(朴贊翊)·정 신(鄭信)·유동열(柳東說)·신팔균(申八均)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서명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윤세복은 그후 일제의 사주에 의한 중국 관헌의 방해로 환인현에서 무송현(撫松縣)으로 근거지를 이동하고 백산학교(白山學校)를 설립하는 한편, 1919년 7월 흥업단(興業團)을 조직하여 총무로서 일하였다. 1921년 10월에는 흥업단이 군비단·광복단·대진단·태극단과 통합하여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을 조직하자 그는 의사부장(議事部長)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에 대종교 제2세 교주인 김교헌(金敎獻)이 사망하자 1924년 초에 제3세 교주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시종일관 대종교를 통하여 항일민족의식의 고취에 진력하였다. 1934년에는 하얼빈시에 나가 김응두(金應斗)·박관해(朴觀海)·김영숙(金永肅)·김서종(金書鍾) 등 여러 사람의 협조를 얻어 하얼빈시 안평가(安平街)에 대종교 선교회를 설치하여 많은 동포들이 대종교 교당을 찾아 단군성조의 위덕을 추모하면서 민족정신을 가다듬게 하였다. 1942년 11월 19일 일제가 대종교를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임오교변을 일으킬 당시 김영숙(金永肅)·윤정현(尹珽鉉)·최 관(崔冠)·이재유(李在 )·이 정(李楨)·권상익(權相益)·나정련(羅正鍊) 등 20여명과 함께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겪다가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