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page


63page

김홍규(金弘圭)는 대종교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신민부와 연락하며 군자금을 모집, 제공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하였다. 김홍규는 1910년대에 윤창선(尹昌善)·손봉현(孫鳳鉉)·손호(孫滸)·윤치백(尹致伯) 등과 함께 대종교에 입교하여 활동하는 한편, 별도로 해원교(解怨敎)라는 종교단체를 조직하였다. 1927년 음력 9월, 대구에서 윤홍선(尹弘善)·손양윤(孫亮尹)·신현규(申鉉圭)·이병묵(李丙默) 등과 회합을 갖고, 지방의 부호 자제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로 모의하였다. 특히 만주에서 활약하던 김좌진의 신민부(新民府)에 군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밀양군 단장면 사연리의 부호 김태진(金泰鎭)에게서 2차례에 걸쳐 3,000원을 모금하였다. 먼저 손봉현은 김태진의 장남 김병연(金秉淵)과 접촉하였다. 손봉현은 김병연에게 해원교를 믿으면 교주를 만나 볼 수 있다며 면담을 알선키 위해 그를 서울로 데리고 나와 신민부와의 연락임무를 맡기로 했던 윤홍선에게 인계하여 만주(길림)로 데리고 갔다. 그때 여비로 쓰기 위해 일본인으로부터 300원을 차용했으니 아버지 김태진에게 갚아 달라는 김병연의 편지를 손봉현이 받아서 돌아왔다. 이에 윤창선은 김병연의 명의로 액면 금 3,000원의 약속어음(군자금 공채)을 만들고, 김광로(金光魯)로 이름을 바꾸어, 대금주로 위장하였다. 손봉현은 김병연의 도장을 위조하고, 이정희(李晶熙)는 김병연의 이름으로 3,000원을 지불해달라는 통신을 작성한 후, 김홍규가 김태진을 직접 만나 군자금의 지급을 요청하였다. 1927년 음 11월부터 음 12월 상순에 이르는 동안, 두 차례에 나누어 금 3,000원을 받았다. 이들의 경찰서 신문조서를 보면 윤창선 1,700원, 윤치백 400원, 손봉현 400원, 김홍규 380원으로 나눈 후 나머지 돈은 경비로서 떼어놓았고, 윤창선은 자신이 받은 1,700원 중에서 손양윤 80원, 신현규 200원, 손호 110원, 이병묵 100원 등으로 나누어 준 후, 잔금 600원을 신민부로 송금하고 만주 안동현에서 1928년 음 정월 말경 돌아왔다고 한다. 또 다른 자료에는 신민부에 보낸 군자금이 1,500원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개인이 착복하지 않고 모집한 군자금을 분산 보관하고 있다가 다시 수거하여 만주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1928년 8월 김홍규를 포함한 손봉현·윤창선·손양윤·이병묵·손호·신현규(일명 申陽春) 등 총 7명이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때 김홍규는 1929년 7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가증권 사문서 위조, 사기, 제령 7호 위반, 강도, 상해죄 등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